'탕평 의지'가 '아들 살해'로…"영조와 사도 예고된 비극"

[신간] '영조와 사도'…의도했던 출발점과 의도치 않았던 종착점 "정치의 역설"

영화 '사도' 스틸컷(사진=쇼박스 제공)
조선의 왕 영조(1694~1776)와 그의 아들 사도세자(1735~1762) 사이에서 벌어진 비극을 그린 영화 '사도'가 추석 대목 극장가에서 흥행 몰이 중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작품으로 변주돼 온 이 사건이 새삼 주목받는 데는, 아비와 아들의 친밀하면서도 적대적인 관계를 밀도 있게 그려낸 덕이 크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명명한 이래, 이 보편적인 정서는 과학의 영역에서 설명돼 왔다. 영화 사도는 이를 정쟁의 촉매로까지 확장시키면서 특별한 설득력을 얻었다.

사도세자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여전히 엇갈리는 가운데, 영화는 그를 일단 피해자로 설정한 뒤 이야기를 끌어간다.

왕이요 아버지인 영조를 끝까지 '초자아'(사회적 규범·권위)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도세자는 결국 '이드'(본능에 충실하려는 심리 상태)의 화신이 된다. 조선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장렬히 산화할 운명에 처한 셈이다.

신간 '영조와 사도'(지은이 김수지·펴낸곳 인문서원)는 영화 사도와 일맥상통하는 관점으로 세자를 바라본다. '300년 전 죽은 세자를 위한 진혼곡'이라는 제목의 서문은 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사도세자 정신병 논란은 어찌 보면 가해자들을 지독하게 온정적으로 옹호하고 피해자가 되레 혹독하게 비난당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미 300년 전에 잔혹하게 죽임을 당했고, 또 자신의 입장을 한마디도 변호할 수 없는 사도세자에게는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이 책은 온갖 가지 이유로 피해자 사도세자에게 참화의 책임을 돌리고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다른 관점과 역사적 사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쓴 것이다.' (6쪽)


◇ "정치적 의도 가진 인간들 행위…언제나 애초 바라던 것과는 다른 결론 얻어"

영조와 사도ㅣ김수지ㅣ인문서원
이 책은 본질적으로 조선 후기 정치사, 즉 노론과 소론의 피 말리는 정쟁사를 다루고 있다. 아비가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데는 복잡한 정치적 환경과 치밀한 정략적 계산이 복합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까닭이다.

'당시 사람들은 누구나 영조가 만들어준 세자의 친소론 성향이 결국 세자를 위험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영조가 소론 위주 탕평을 포기하거나 노론 강경파들의 집요한 요구에 밀리는 순간 세자는 바로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는 말이다. (중략) 세자를 둘러싼 이런 상황은 숙종이 희빈 장씨를 죽인 뒤 희반 장씨의 아들 경종으로 보위를 승계시킬 것인지 아닌지 조선의 모든 정치세력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정국의 추이를 지켜보던 시절과 비슷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숙종이 희빈 장씨를 죽이면서 단행했던 환국의 결과물들이 여전히 망령처럼 사라지지 않고 떠돌고 있는 셈이었다. (229, 230쪽)

지은이는 이렇듯 "사도세자가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 정치적 배경에는 소론 포용 탕평책이 차츰 무너져간 것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강조한다. "친소론의 홍보물로 이용된 사도세자는 영조 이후 차기 권력을 노론 일당 독재로 만들고 싶어 하던 정치세력들에게 자연스럽게 타도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가 영조를 평생 '출생의 비밀'과 '경종 독살설'에 시달린 콤플렉스 덩어리, 권력 중독자로 바라보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영조가 아들을 혹독하게 괴롭힌 것은 자신이 세제 시절부터 평생을 불안이라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권력을 잡기까지도 불확실한 나날이 이어졌고 즉위한 이후에도 반란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정치적 격변 속에서 살았다. 탕평책은 사실상 영조가 왕으로 살아 남기 위한 왕의 전쟁이었다.' (301쪽)

'결국 영조는 아들을 삼복더위가 한창인 여름날, 물 한 모금 주지 않고 그렇게 뒤주 안에서 고통스럽게 굶겨 죽였다. 여드레 뒤인 영조 38년(1762) 윤5월 21일, 세자가 죽은 것이 확인되었다. 영조는 30년에 가까운 부자 간의 은의를 생각하고 세손의 마음을 생각해서 시호를 사도세자로 하라고 명했다. 사도(思悼). 죽은 것을 슬프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69세의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세자 이선. 향년 28세였다.'(334쪽)

"정치적 의도를 가진 인간들의 행위는 언제나 애초에 바라던 결론과는 다른 결론을 얻는다"는 것이 조선 후기 당쟁사를 파고들었던 지은이의 견해다. 영조 역시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리라.

"바라던 결론을 얻기 위해 의도를 가지고 노력했지만 결론에 도착해보면 원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역설적인 상황은 이 과정에서 발생한다 의도했던 출발점과 의도하지 않았던 종착점, 그 모순된 역설적인 상황을 영조 역시 피해 가지 못했다"고 지은이가 전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정조는 할아버지의 유산인 그 멍에에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밤낮없이 투쟁해야 했다. 할아버지 영조가 즉위할 때의 반쪽 정통성, 그 자리에서 손자인 정조도 다시 출발해야 했던 것이다. 영조가 탕평을 쓰면서 의도했던 왕권 강화는 역설적이게도 아들을 죽였고, 그 잔인한 죽음을 깔고도 결국 강력한 왕권을 온전하게 정착시키는 데까지는 나가지 못했던 것이다.' (340, 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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