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를 풍미한 원조 걸그룹 김시스터즈를 소개하는 신간 '한국대중음악사 산책'(지은이 김형찬·펴낸곳 알마)의 일부분이다. 김시스터즈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한 소개를 들어보자.
'해방 이후 가장 먼저 등장한 보컬그룹은 김시스터즈라는 여성 트리오였다. 이들은 당시 트로트 대가수 이난영의 딸 셋으로 이루어진 팀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천재 음악가였던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이 월북하자, 이난영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딸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켜 1953년 수도극장에서 김시스터즈의 데뷔 공연을 열었다(이때 나이가 14세, 13세, 12세였다). 이들은 부모의 재능을 이어받아 실력이 출중했고, 한국에 왔던 미국 흥행사의 눈에 띄어 발탁되기에 이른다.' (121쪽)
김시스터즈는 그렇게 1959년 미국으로 건너가 라스베이거스 무대에서 경력을 쌓으며 밑바닥에서부터 고난의 생활을 시작했다. 10여 가지 악기를 다루던 그들은 현지 유명 잡지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지은이는 그 이면에 똬리를 틀고 있던 서양인의 눈으로 재단된 동양, 즉 '오리엔탈리즘'을 놓치지 않는다.
'기사는 미국인들의 기호를 맞추기 위해 불렀던 곡에 대해서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그들이 이해하기 힘든 낯선 선율과 동작에 대해서는 편견을 드러낸다. (중략) 그들이 기대한 것은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모방이 아니라 이국적이며 동양적인 분위기였는데, 막상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적어도 라이프의 평가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125쪽)
책은 곧바로 김시스터즈의 미국 활약상을 보도하는 한국 매체들의 감탄 일변도를 대비시키며 다음과 같이 비판적인 분석을 내린다.
'현재도 스포츠 보도를 할 때 애국주의적·민족주의적 기사가 난무하는 형편인데, 미국에 대한 동경이 절대적이었을 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미국에서의 성공은 세계 시장에서의 성공을 뜻했고, 격동의 근대사에서 자존심에 입은 상처를 회복한다는 의미였다. 1970년 5월 23일 김시스터즈가 한국에 와서 6일 동안 12회의 공연을 했을 때, 자랑스러운 대한의 딸들을 환영하기 위한 열기는 지금의 피겨스케이팅 스타 김연아 열기에 버금갔다. (125, 126쪽)
◇ 이 땅 위 청춘들을 뒤흔든 사건과 노래에 관한 뚜렷한 기억
'한국대중음악을 다룬 저서들은 거의 대부분 1차 자료에 대한 치밀한 조사를 동반하지 않았다. 대중문화사적인 통찰이 부족한 채 개인의 경험과 직관을 위주로 저술되어, 글이 상식적이고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이 때문에 대중들은 한국대중음악에 대한 책들이 별다른 전문성이 없는 연예계의 가십거리 정도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또 연극·영화·미술·문학 등 여타의 예술 장르에 비해 한국대중음악은 감각적인 소비만으로 충분한, 즉 이성적이고 지적인 통찰은 별로 필요 없는 장르로까지 받아들여졌다.' (5쪽)
결국 이 책은 한국대중음악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와 분석을 통해 그 지위를 복원하기 위한 첨병인 셈이다. 이 책의 최대 목표가 재미에 맞춰진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에 따라 앞에서 엿본 김시스터즈에 대한 설명처럼 대중들이 관심 있어 할 만한 토픽을 주로 활용했다. '읽는 책'에서 '보는 책'으로의 전환을 추구하기 위해 미술이나 대중문화잡지에 실렸던 이미지들을 대거 활용한 점도 눈길을 끈다.
그 덕에 이 책은 해방 이후 근대 대중음악의 태동부터, 미군정기와 1950년대 전후 참상 속에서 이뤄진 대중음악의 약진, 1960년대 청년문화세대의 폭발과 1970년대의 다채로운 양상들까지를 입체적으로 펼쳐놓는 데 성공한다.
책은 1975년 말에 터진 연예계 대마초 사건을 끝으로 마무리된다. 현재까지도 진행형인 것처럼 다가오는, 한국대중문화의 결정적인 한 시기를 마감케 했던 이 사건에 대한 지은이의 설명을 마지막으로 전한다.
'새로운 문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기성세대와 권위적인 군사정권이 합작하여 청년문화세대를 문화적으로 숙청한 것이다. 기성세대와 박정희의 속은 시원했을지 모르겠으나, 사회 변화의 새로운 동력인 청년을 몰아냄으로써 한국사회에는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경직된 군사정권은 향후 10년 이상 더 이어져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사회는 전후의 상흔을 떨치고 문화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렸을 뿐만 아니라, 문화의 허리를 끊어놓아 한국대중문화의 발전에 치명타를 안겼다. 박정희 군사정권과 청년문화세대의 만남은 최악의 궁합이었고, 단언컨대 한국사회 최대의 불행이었다.' (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