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FF가 사랑한 영화] '자객 섭은낭', 침묵이 그려낸 수묵화

"한 번보다는 두 번, 두 번보다는 세 번이 더 좋은 영화"

영화 '자객 섭은낭' 스틸컷,
숨소리조차 고요하다. 그곳의 풍경들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다.

영화 '자객 섭은낭'은 '비정성시'로 유명한 대만 감독 허우샤오시엔의 작품이다. 그간 대만 현대사에 집중했던 그가 이번에는 당나라 시대로 눈을 돌렸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여승에게 납치돼 무술을 연마한 장군의 딸 섭은낭(서기 분)은 포악한 관리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도맡는다. 그러던 중 여승으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가 13년 전 정혼했던 사이인 절도사를 암살하라는 명을 받는다. 섭은낭은 그곳에서 부모와 과거를 맞닥뜨리게 되고,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그 표현 방식은 간단하지 않다. 섭은낭은 치열한 갈등과 고뇌에 빠지지만 그것이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로 나타나지 않는다. 주인공인 그의 대사는 지극히 제한돼 있고, 그렇다보니 감정 역시 가늠하기 힘들다.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상상하게 만드는 표현을 좋아하는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기질이 그대로 드러난다.

단서는 그의 행동이 남기는 흔적 뿐이다. 대체로 섭은낭은 냉정한 암살자지만, 때때로 아들과 함께 있는 관리를 죽이지 못하거나 위기에 빠진 정인의 애첩을 구한다. 정인이기 때문에 암살을 갈등하기 보다는, 애초부터 인간적인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결국 섭은낭이 끊어내지 못한 이 마음은 결말까지 이어진다.


누군가는 암살자인 섭은낭이 화려하면서도 초현실적인 액션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할 수도 있겠다. 흔히 생각하는 중화권 무협영화와 달리, 영화의 액션은 지극히 생존 지향적이고, 현실적이며 남발되지 않는다. 흥미를 돋우기 보다는 침묵을 깨는 변화구에 가깝다.

'자객 섭은낭'은 무협을 위한 무협영화가 아니다. 대만 뉴 웨이브를 선도한 이답게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평범한 무협영화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공이 높은 두 사람 혹은 세력이 대척점에 서서 결투를 벌이거나, 멋있는 대사를 주고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섭은낭이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춰 끊임없이 그 내면과 생애를 파고든다.

허우샤오시엔 감독 특유의 고요하면서도 느린 호흡은 '자객 섭은낭'에서 절정을 이룬다. 영화는 시종일관 천천히 흘러가고 장면들은 마치 병풍에 그려진 수묵화 한 폭, 시 한 편처럼 그곳에 자리할 뿐이다.

감독은 배우의 숨소리 하나조차 허투루 담아내지 않지만 자연에게는 꽤나 관대하다. 정교하면서도 압도적인 풍광은 오히려 절제된 캐릭터들보다 선명하게 살아 움직인다.

그 호흡법이 맞지 않는 관객에게 영화는 다소 지루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적응에 성공한다면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감각이 펼쳐질 것이다. '한 번보다는 두 번이, 두 번보다는 세 번이 더 좋은 영화'라는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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