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국정교과서' 모든 현안 빨아들이는 '블랙홀'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지난 12일 세종시 정부청사 교육부에서 가진 역사교과서 발행체제 개선방안 기자회견에서 한국사 교과서 국정 전환을 공식 발표했다. (사진=윤성호 기자)
대한민국이 어쩌다 역사교과서 대결이라는 처연한 국면으로 치닫는가?

지역 대립도 극복하지 못하고 골이 패일대로 패인 이 때에 이념을 토대로 한 보수와 진보 진영 대립이 극한 대결 양상을 보이고 있다.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빚어낸 씁쓸한 2015년 10월의 현실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가 파문을 불러일으키면서 모든 국가의 중대한 현안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있다.

20여일 전까지만 해도 당장 노동개혁을 하지 않으면 경제가 망할듯, 국가가 침몰할듯 모든 국정의 최우선 순위에 두던 청와대와 정부·여당이 노동개혁법안을 작성하지도 않은 채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올인하고 있다. 금융 등 4대 개혁도 흐지부지되는 듯하고 정부의 경제살리기와 청년 일자리 창출 분위기도 교과서 국정화에 묻혀버리고 있다.

여당의 김무성 대표는 연일 좌파 중심의 학자들로 쓰인 역사교과서를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며 국정화에 힘을 싣고 있으며 그동안 침묵하던 박근혜 대통령도 "역사 교육 정쟁이 국민을 갈라선 안 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13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역사 교육은 정쟁이나 이념 대립에 의해 국민을 가르고 학생들을 나눠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13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주재 수석비서관회의 (사진=청와대 제공)
'유체이탈' 화법이다. 국민 여론은 이미 갈라질 대로 갈라져 회복하기 힘든 지경으로 빨려가는 모습인데도 교과서 국정화는 당연한 일이고 반대하는 세력, 학자·언론을 국론 분열과 국민 갈등·대립의 진원지로 지목한 것처럼 들린다. 교과서 국정화의 불은 청와대가 질렀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다 안다. 김무성 대표를 비롯한 여당 지도부가 총대를 메고 있는 것도…

정부·여당의 말처럼 일부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기 때문에 개정하자는 제안을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꼭 검인정제를 폐지하고 국정화를 해야 하는 것인지 등에 대한 토론다운 토론, 학자들의 의견 청취가 거의 없었다. 일부 보수층을 중심으로 한 국정화론만 무성했다. 게다가 2017년이라는 시한을 정해놓고 속도전을 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전국 대학의 역사학자들은 역사를 왜곡하는 길로 가는 것이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급기야 연세대 사학과 교수 전원은 집필 거부를 선언했다. "40년 전(1973년) 유신 교과서가 재현되는 모습을 보면서 참담하다"고 절규했다. 연세대 사학과 교수들을 필두로 전국의 사학과 교수들이 너도나도 국정 교과서 작성 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거부 선언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은 정치권만 싸운다고 욕을 먹을 것이다. 따라서 국민이 정부와 정치권에 대해 느끼는 '체감 피로도'는 최대치에 가까울 것이다. 국민 갈등지수는 치솟을 것이다.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오죽했으면 여당의 핵심 당직자조차도 왜 이 시점에 역사교과서 문제를 갖고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했겠는가. 역사교과서보다 중요한 국정 과제와 입법 사안들이 많은데 역사 교과서 문제로 인해 이번 정기국회가 물건너가버리지나 않을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정기국회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묻혀버리고 있다. 노동개혁과 시급한 민생법안들이 교과서 국정화라는 돌부리에 걸려 허우적거릴 개연성이 농후하다.

심지어 미국을 순방중인 박근혜 대통령의 한미정상회담의 성과까지도 빛을 바래게 만드는 악재가 될 수 있다.

원내외 투쟁을 선언한 야당이 아직은 정부·여당의 교과서 국정화를 입법이나 예산안 처리와 연계하겠다고 밝히진 않고 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강경 일변도로 나갈 수 있다. 야당에 모처럼 투쟁의 동력이 모이고 있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와 천정배 의원이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의 교과서 투쟁 대열에 함께 하고 있다. 진보 진영의 단합을 위한 구실을 제공한 셈이다.

정치적 수 싸움과 체급(정치 9단)에서 보통 정치인의 범주를 벗어나 있는 박근혜 대통령이 이를 노렸을지도 모른다. 내년 총선을 보수 대 진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으로 구도화하고 김무성 대표 등 여당 내 비박계를 움쭉달싹 못하게 하겠다는 정치적 계산을 했음직도 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도를 바탕으로 김무성 대표와 원유철 원내대표를 앞세워 교과서 국정화 파동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지라도 이념과 지역 대립으로 찢긴 국민의 가슴 속을 다시 한번 후벼판데 대해서는 응어리로 남을 수밖에 없다. 당장은 아니어도 역사는 그걸 낱낱이 기록하고 기억은 언젠가 떠올려진다. 역사가 가르친 교훈이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 원장과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국가적으로 참으로 위중한 시기인데 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이렇게 대립할 때인가 생각이 든다"며 "양쪽 모두 국사 교과서를 갖고 극한 대결로 가는 것은 잘못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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