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자랑스러운 역사, 한국 근·현대사가 부끄러운가

상고사 늘리고 근·현대사 줄인다?… 근·현대사에 무게두고 집필자 명단 공개해야

1987년 6월 26일, 독재타도를 외치며 부산 문현로터리에서 진행된 '국민평화대행진' 행사 도중 한 시민이 웃통을 벗어던진채 "최루탄을 쏘지 말라"며 뛰어가고 있다. (사진=고명진 기자 사진 발췌)
대한민국이 5천년 역사상 지금처럼 융성한 적이 없다. 세계로 웅비하는 대한민국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국가가 됐다. 우리 선조들에게도 떳떳한 세대가 됐다.

그런 자랑스런 역사는 그냥 이뤄지지 않았다. 집권자들은 모든 게 자신의 공로로 받아들여주길 기대할 것이고, 사실 그렇지만 역사는 민초들의 피땀 어린 노고를 바탕으로 국민의 타고난 근면성, 지도자의 혜안, 세계적 조류 등 천 가지, 만 가지, 수백만 가지 이유들이 한 데 얽히고설켜 이룬 유장한 물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역사를 단행본 교과서라는 한 권의 책으로 기술함에 있어 어느 시대, 어떤 부분을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지는 자명하다. 국가적 에너지가 어느 때에 씨줄과 날줄로 순환계를 제대로 이뤘는지가 우선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5천년 역사 가운데 세계에 내놓아도 보란 듯한 대한민국의 역사는 현대사(혹자는 고구려와 신라의 통일 과정 정도)이며 그 토대는 근대의 질곡의 역사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조선의 패망과 일제 식민지 시대라는 처절한 시기를 거치며 독립운동으로 점철된 역사가 없었다면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하면 된다는 신념과 의지가 태동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광복과 정부수립, 한국전쟁, 군사 쿠데타와 그 파생물인 독재, 근대화, 민주화, 정보화, 선진화의 문턱에 이른 70년이야말로 온갖 간난신고를 '굴기(倔起)'로 승화한 현대사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이런 평가에 동의하던, 하지 않던 한국의 현대사를 잘못된 역사(때론 굴곡진 때도 있었음)로 부정하는 원심력보다는 긍정 평가하는 구심력이 훨씬 크지 않을까. 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고 검인정제를 강화하자는 사람들 대다수는 한국의 현대사가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결사 반대 투쟁을 하고 있는 야당이나 오피니언 리더들도 한국 현대사 70년을 부정하거나 비굴하다고 폄하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광스럽다는 입장이다.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압하고 친일파와 결탁하여 체결한 을사늑약 기념사진. 맨 앞 줄 가운데에 이토 히로부미가 앉아있고, 이토 왼쪽이 하세가와 조선 주차군 사령관, 오른쪽이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 그 오른 편에 앉아 있는 네 명이 '을사오적;으로 추정된다. 을사오적은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다. (사진=병합기념조선사진첩)
국정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든 안 된다고 반대하는 진보든 현대사의 역사 인식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 다만 보수층에서는 진보가 현대사를 부정한다고 느낄 뿐이고, 진보층에서는 보수가 역사를 입맛대로 바꾸려 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자랑스런 근·현대사라는 공감대를 이뤘다고 한다면 우리가 어떤 교과서를 만들어야 하는가. 이건 어리석은 질문에 해당한다. 삼척동자(三尺童子)에게 물어보더라도 당연히 근현대사를 주로 다루고 배워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근현대사 논란을 피하고자 상고사와 고대사 분량을 늘린다고 한다. 현행 교과서에서 한 단원에 그치는 상고사 서술을 두 단원으로 늘릴 계획이다. 이는 한국사를 제대로 모르는 것이거나 여론의 뭇매를 피해보자는 의도에서 비롯된 회피용 처방전이라고 할 수 있다. 구석기·신석기·청동기 시대를 주로 배워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우리 아이들에게 상고사와 고대사를 제아무리 자랑스러운 역사라고 가르친들 그들이 받아들일 것 같지 않다. 지금의 10대와 20대들에게 아버지·할아버지 때의 배고픔을 얘기하면 '무슨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얘기냐'며 들으려 하지 않는다. 무미건조한 국사 교과서를 스토리텔링(이야기화) 한들 그들의 귀는 시험 준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보일 것이다.

상고사와 고대사만을 보면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역사를 가진 나라와 민족이 많아도 너무 많다. 세계사에 조금만 관심을 갖고 들여다 봐도 금새 알 수 있다.

국정 교과서의 대표 집필자인 신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고대사(삼국시대~통일신라·발해)를 부각시키겠다"며 "통일신라의 통일을 크게 다루겠다"고 말했다. 6일 사퇴 의사를 밝혔지만 최몽룡 서울대 명예교수 역시 상고사 전공자다.

역사학자 90%가 국정화를 반대하는 바람에 집필자를 대폭 줄이고 급기야는 근현대사 분량을 축소하겠다는 의도 아닌가 판단된다. 이런 구성으로선 '우리 학생들에게 자랑스런 역사를 배우도록 하기 위해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한다'는 청와대나 김무성 대표의 교과서 국정화 취지·주장을 퇴색시킬 수 있다. 오히려 배치되는 것이다.

6명의 집필자 가운데 두 명만을 공개하고 나머지 4명을 비공개로 한 것도 논란을 피하려는 의도치고는 꼼수로 비쳐진다. 투명하게 공개하고 정정당당하게 추진해도 밀실 편찬이라는 비판이 나올 텐데 집필 학자들을 비공개하면 의혹은 오히려 배가될 것이다. 참여 학자들을 보호하려는 목적이라고 해명하더라도 역사학계의 밀실 편찬 주장에 탄력을 더해주는 결과가 될 것이다.

더욱이 70대 노학자들만을 내세워선 곤란하지 않을까. 노장청 조화를 이뤄 활발한 토론을 해도 시원치 않을 상황에 비밀·밀실주의에 늙수그레한 원로 학자들만으로 교과서를 집필한다면 그 설득력은 더 떨어지고 비판론은 심화될 것이다. 야당의 주장처럼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노년의 시각이 단행본 역사책에 고스란히 담길 수 있다.

자랑스러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첫걸음은 대표 집필진의 절반 또는 2/3를 근현대사 전공 역사학자들로 채우고 투명하게 명단을 공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기록을 줄인다고…그러고선 너희들이 후손들 맞냐? 역사를 사랑하고 자랑스럽다고…말짱 거짓말이야!'라고. 독립 운동가들과 민주화 운동가들의 외침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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