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작렬] 中·대만 공동역사책과 국정교과서

분단 66년만에 첫 정상회담을 가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과 마잉주 대만 총통 (사진=유튜브 영상 캡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마잉주 대만 총통이 지난 7일 역사적 첫 만남을 통해 '하나의 중국'을 재확인하며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관계 개선을 과시했다.

공식 직책 대신에 '선생'이라 호칭하며 고량주 2병을 비웠고 "우리는 뼈가 부러져도 살로 이어진 형제" 같은 말들이 오가는 훈훈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미 두 차례의 정상회담을 가졌지만 여전히 반목과 적대를 거듭하는 남·북한에는 자성과 분발을 독려하는 매운 회초리로 다가온다.

물론 중국이 대륙과 대만으로 분리된 역사적 과정과 오늘날의 현실은 남북과 크게 다르다.

또 이번 양안 정상회담은 대만의 집권여당을 밀어주기 위한 정략적 목적도 다분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분리세력을 자극하는 역풍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막히면 돌아서라도 끝내 바다에 이르고야 마는 장강의 큰 물결처럼 '하나의 중국'이란 역사 과업에 한 발짝씩 다가가는 중국인의 저력만큼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은 이미 일본제국주의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기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국공합작을 두 차례 성사시킨 역사가 있다.

이 가운데 2차 국공합작의 시발점이 된 1936년 시안(西安)사건은 군벌 장쉐량이 상관인 장제스를 감금하고 '일치항일'(一致抗日) 약속을 받아내며 역사의 흐름을 바꾼 극적인 사건이다.

우리로 치면 용서받지 못할 하극상 사건이겠지만, 감금에서 풀려난 장제스는 이후 장쉐량에게 연금 상태 이상의 처벌은 가하지 않았다.


장제스가 한때 비적(匪賊) 쯤으로 여겨온 공산당에 본토를 내주고 대만으로 쫓겨난 뒤 절치부심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 장제스에게 1949년 10월1일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중화인민공화국 개국 선포식은 공산당 지도부를 일소할 절호의 기회였다.

당시 장제스의 공군은 중공군을 압도하기에 충분했고, 출격 명령을 재촉하는 공군의 전화가 빗발쳤지만 "기다리라"는 명령만 거듭하다 끝내는 작전 취소를 명령했다.

장제스가 염려했던 것은 선대의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역사의 죄인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중국인 이야기1. 김명호 저)

남북관계와 양안관계를 가르는 중대한 차이점 중 하나는 바로 이런 것이다.

중국에서의 좌우 투쟁은 이념적 방법론의 차이일 뿐 기본적으로는 중화민족을 위한 것이었다. 최소한 '친일(親日)' 이슈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반면 일제 해방 직후 한반도에서의 이념 대립은 친일의 흔적을 감추고 지우기 위한 성격이 일부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김구와 여운형 등을 위시해 이승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념 노선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결국 상당수는 흉탄에 스러지고 이승만 정도만 남아 친일부역자들에 둘러싸이게 된다.

당시 반민족특위 강제 해산 사건이 단적으로 말해주듯 친일파 단죄에 실패한 역사는 광복 70년인 지금까지도 뼈아픈 족쇄가 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이 마잉주 총통에게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을 맞아 공동 역사책을 쓰자고 제안한 것은 적어도 친일 논란에서는 양안 모두 자유롭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한 국가 내에서조차 국사 교과서 국정화 여부를 놓고 ‘역사 전쟁’이 벌어지는 배경에도 따지고 보면 친일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대국굴기하며 통합으로 치닫는 중국과 달리 우리는 왜 퇴행성 분열지향의 길을 자초하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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