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이 너무 흔해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세상을 살고 있다. ‘하얀 쌀밥에 소고깃국 먹어보는 게 꿈’인 시절이 있었다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나로서는, 쌀 풍년이 골칫거리라는 뉴스를 들으면서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낀다. 어쨌든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쌀밥 타령을 하느냐는 소리도 들을 법하다. 식탁 위에 쌀로 지은 밥이 올라오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은 세상이니까 말이다. 쌀은 이미 우리의 주식(主食)도 아니고, 농자지천하대본(農者之天下大本)의 중심도 아니고, 전략식량의 무기도 아니다. 오히려 넘쳐나는 쌀을 보관할 양곡창고가 부족한데다가 마땅히 소비할 곳도 없어 골칫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오죽하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쌀을 보관하느라 지출되는 국가예산을 줄이기 위해 차라리 ‘바다에 빠뜨리자’고 말하는 국회의원까지 나올까.
현재 정부의 양곡창고에는 UN식량농업기구(FAO)가 권고한 적정 비축량(72만t)의 두 배 가까운 136만t의 쌀이 재고로 쌓여 있다. 2천만여 명이 한 해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이를 보관하는 데 연간 4천300억 원의 비용이 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올해 단위 면적당 쌀 생산량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10a(1000㎡)당 생산량은 지난해 520㎏보다 4.2% 증가한 542㎏이다.
그러다 보니 창고에 쌓여만 가는 묵은쌀을 보관하는 비용과 농민들에게 지급하는 쌀직불금까지 더해 올해 2조원에 육박하는 국비가 필요하다. 쌀 풍년이 들수록 국가 재정이 축나는 시스템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국민들 입맛이 서구화되면서 쌀 소비가 반 토막 났고, FTA(자유무역협정)로 자동차 반도체 등을 수출하는 대신 필요 없는 쌀을 수입해야 하고, 쌀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는 생계를 보장해주느라 직불금 주어야 하고… 쌀은 이래저래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되고 말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쌀농사가 너무 잘돼 사상 최고의 풍작이다. 한반도를 향해 한 두 번 쯤 들이닥칠 법한 태풍도 없고, 벼멸구 같은 병충해도 없고, 가을 들어 일조량까지 너무 좋아서 나락 알이 주렁주렁 달렸다. 옛날 같으면 이보다 더한 경사가 어디 있을까. 국민들이 굶주리지 않고 배불리 먹을 수 있고, 전시에 대비한 군량미도 비축할 수 있고, 농부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고, 들녘엔 풍악이 울릴 텐데.
문제는 쌀 정책에 대한 시각차다. 그러니까 정부가 FTA 체결로 인한 농가 피해를 보전하기 위해 도입한 쌀직불금 제도가 오히려 쌀 생산을 줄이고 타 작목을 재배하도록 유도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쌀직불금을 인상(1ha당 90만원에서 올해 100만원으로 인상)하는 것도 결국 고령화된 농민들이 힘든 밭농사 대신 논농사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구조를 고착시켜 놓았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기후와 지리적 특성, 역사성 등을 보아도 주요 재배작물은 쌀이다. 이 땅에 밀농사를 지어 쌀을 대체할 수는 없다. 그러니 쌀이 넘쳐난다고 재배 면적을 줄이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그나마 쌀직불금 제도를 통해 농민들이 논농사의 명맥을 이어가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국가 미래 식량 전략에도 유리하다.
하늘이 도와 우리나라에 10여년 풍년이 들었듯이 앞으로 10여년 흉년이 오지 말란 법도 없다. 초대형 태풍이 한반도에 상륙해 황금들판을 싹쓸이해 쌀 한 톨 거두지 못하는 날이, 가뭄이 들이닥쳐 논바닥이 갈라지고 벼에 쭉정이만 매달리는 날이 오지 않을 것이란 보장도 없다. 10년은 고사하고 5년 연속 흉작으로 쌀 수확이 거덜 나면 당장 식량수급 문제로 호들갑을 떨 것이 아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내일 일은 모른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홍수와 가뭄 등 자연재해로 식량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우리는 넘쳐나는 쌀을 바다에 버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나라에 살다 보니 식량문제에 둔해져 있다. 그러니 국가 재정이 아까워 농민들이 쌀농사를 포기하도록 하는 것은 위험하다. 언제 닥칠지 모를 식량재난에 속수무책 당하지 않으려면 쌀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굶주림을 면하게 해줄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