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재임중에는 군부내 정치집단화한 '하나회'의 싹을 완전히 도려냄으로써 정치군인들이 발딛고 섰던 토대를 허물어 내고 이후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진 민주정부의 초석을 깔았다.
경제분야에서는 대통령 재임 중 금융실명제로 경제의 투명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전기를 마련했으나 한계에 다다른 관주도 국가주도경제의 폐해에 제때 대응하지 못해 IMF에 국가경제주권을 넘겨주는 과오를 범했다.
정치인 김영삼은 25세 최연소 국회의원, 최연소 야당원내총무(1965년), 최초의 문민대통령(1992) 등 정치인생 내내 전인미답의 길을 걸었고 동시에 권력을 지향하면서도 항상 권력보다는 국민다수와 약자의 편에서 있었다.
이승만정권 당시 자유당에 몸담고 있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3선개헌을 추진하자 탈당해 민주당 창당에 가세했고 박정희정권 시절인 72년 유신반대투쟁의 전면에 섰으며,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목숨을 건 단식농성을(23일) 벌였다.
1984년 동지인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재야세력과 연합해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발족시키고 '호헌철폐 대통령직선제 쟁취' 투쟁에 나서 제 민주세력과 더불어 1987년 6월항쟁을 이끈 한축이 됐다. '닭의 목을 비뚤어도 새벽은 온다'는 김 전 대통령의 말은 민주화운동의 이정표이자 후대까지 이어지며 'YS어록'으로 회자됐다.
1987년 대통령선거때 민주진영이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해 군부독재가 노태우정권으로 연장되는 과오를 범했지만, 3당합당을 전격적으로 성사시키고 집권주류세력과의 험난한 권력투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14대 대통령선거에 당선됐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의 정통성을 지닌 정권으로 기록됐으며 이후 문민정권들의 초석이 됐다.
YS는 더 나아가 대통령 재임중에는 군부내 사조직이 군의 정치화를 부추기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원인이라고 판단,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을 중심으로 구성됐던 하나회를 해체시켰다.
김 전 대통령은 하나회 해체 과정에서 예상되는 군부내 반발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 당시 국방부장관 조차도 감쪽같이 속을 정도로 은밀하면서 과단성있고 치밀하게 군개혁을 추진, 국민적 지지를 얻었다.
또한, 역사바로세우기를 통해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의 죄상을 밝히고 군부독재정권과 경제계간의 검은사슬을 밝혀 부정축재재산을 환수조치하는 등 노태우정권에서 미완으로 끝났던 군사독재에 대한 단죄를 매듭지었다.
경제분야에서는 공과 과가 교차했다. 1993년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금융실명제를 도입해 지하.음성거래를 양성화하고 검은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단초를 마련했다. 제도시행초기 정부 뜻대로 차명거래가 전부 실명거래로 전환됐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제도에 대한 찬반논란이 일었지만 이를 계기로 투명한 금융거래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바뀐 건 사실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정치,경제,역사,군개혁 등 여러분야에서 헌정사상 가장 많은 치적을 쌓은 대통령으로 기록될 정도로 왕성한 개혁을 이뤘지만 임기말에 닥친 IMF로 인해 재임중 치적의 상당수가 빛이 바래고 말았다.
1997년초부터 과도한 차입에 의존해 기업을 운영해오던 기아자동차와 대우그룹에서 유동성 위기의 적신호가 켜졌고 외환보유고가 바닥수준에 머물렀지만 선제적 대응에 실패했다. 김 전 대통령은 그해 연말 국제통화기금에 돈을 벌리는 수모를 겪게 된다.
정경유착을 토대로 대기업집단에 돈을 몰아주고 인허가 특혜를 부여하는 식으로 발전해왔던 한국경제가 한계에 이르러 경제체질이 필요했지만 집권초 정치와 군 등 개혁과제에 밀려 경제체질개선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의 시기를 놓쳤다는 지적이 나왔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초기부터 구설수에 올랐던 아들 김현철씨의 국정농단의혹과 측근들의 부패는 씼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다. 대통령선거 당시부터 활동했던 이른바 나라사랑운동본부를 중심으로 한 아들의 국정개입의혹은 김영삼정부에 여러가지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었다.
집권말기 아들은 물론이고 권력 창출의 공신들 조차 부패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김 전 대통령의 많은 업적들은 빛이 바랬고 권력의 전면에서 쓸쓸히 퇴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