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군부독재정권의 유산이던 여러 ‘적폐’를 청산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양김의 대결은 지난 1992년 12월 18일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끝나는 듯했다. YS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다음날인 19일 DJ는 정계를 은퇴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으로 연수를 떠난다고 밝혔다. DJ 지지자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DJ가 대통령에 대한 꿈을 영원히 접는 줄 알았다.
그런데 단 한 사람은 DJ가 대통령을 향한 꿈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다고 한다. YS다. 故(고) 김윤환 민자당 전 대표는 “DJ가 정계를 은퇴한다고 선언했을 때 YS만은 DJ가 정계은퇴를 번복하고 복귀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훗날 전했다.
당시에 이기택 민주당 총재가 경기지사 후보에 이종찬 전 의원을 내자는 요구를 거부하고 자신의 측근인 장경우 후보를 고집하는 바람에 경기지사를 놓쳤을 뿐 서울 구청장 선거를 싹쓸이했다. YS의 전광석화 같은 개혁 정책에 대한 피로도와 경제 실정에 대한 심판론에 편승한 DJ의 승리였다. DJ는 지방선거를 이겨야만 정계복귀의 발판이 마련된다고 판단했다.
지방선거 유세 때 DJ는 “김영삼 대통령이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말을 자주 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성공해야 양김 씨가 잘한다는 평가를 받을 게 아니겠느냐”며 “난 진정으로 김영삼 대통령과 만나 국정을 논하고 싶다”고 했다. YS가 민주화동지임도 수차례 강조했다. 당시 정치 평론가들은 “DJ가 YS에게 구애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여당인 민자당과 청와대는 DJ의 이런 구애작전을 철저히 외면하며 DJ 때리기를 노골화했다. DJ는 지방선거를 승리하자 YS의 국정운영을 거세게 공격했다.
양김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 정치 인생을 걸고 최후의 결투를 벌인다. 서로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혈안이 됐다. 지금 한국 정계를 주름잡고 있는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의 중진 의원들 대부분이 YS와 DJ의 인재 수혈을 통해 이때 정치권에 입문했다.
급진적인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던 이재오 의원과 김문수 전 경기지사가 YS에 의해 픽업돼 신한국당에 입당한 것도 이때다. 물론 정세균 , 천정배, 추미애, 신기남 의원과 정동영 전 의원도 DJ의 국민회의에 의해 15대 국회 때 입성했다.
양김의 말없는 혈전이 그나마 괜찮은 정치권 인재를 양산했다. 전략공천을 통한 인재 육성이었다. 그들의 선거비용도 전액 당에서 지원해줬다. 과반 의석은 아니지만 YS가 큰 승리를 거뒀다. YS의 신한국당은 139석을, DJ의 국민회는 79석을 얻는데 그쳤다. 95년 지방선거는 DJ가, 96년 총선은 YS가 승리하는 등 양김은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다.
대망의 1997년이 되자 누가 대권을 거머쥘 것인가가 새해 벽두부터의 화두였다. 야당의 변함없는 대권 후보는 DJ였고 여당은 9룡시대를 맞았다. 우여곡절 끝에 이회창 전 총리가 후보로 나섰고, 이인제 전 경기지사가 독자 출마하는 바람에 그해 대선은 3파전으로 치러졌다.
현직 대통령이던 YS는 자신이 대선 후보로 키운 이회창 후보로부터 배신을 당했다며 직.간접적 선거 지원을 거부했다. 우회적으로 DJ의 당선을 도왔다. 강삼재 당시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폭로한 검찰의 김대중 비자금 수사를 유보시켰고, 이인제 후보의 탈당과 독자 출마를 막지 않은 것이 YS의 DJ 지원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실제로 YS는 지난 2010년 친이계 의원들의 초청 간담회에서 “97년 11월 (이회창 후보의 탈당 요구에 대해) 신한국당을 탈당한 뒤 이회창씨는 절대 대통령 안 시키겠다는 각오를 했다”고 고백했다. YS는 또 “내가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군 개혁으로 평화적 정권교체의 기틀이 마련됐다는 얘기다.
김대중 당선인도 YS의 간접적인 선거 지원을 알았다. DJ 측은 YS의 청와대에 선거 중립만 지켜줄 것을 여러 경로를 통해 간곡히 요청했었다. 97년 대선 직후까지만 해도 YS와 DJ는 경쟁과 갈등·대립관계를 청산하고 화해하는 줄 알았다.
1997년 12월 20일 YS는 현직 대통령 자격으로, DJ는 대통령 당선인 자격으로 청와대에서 마주 앉았다. 축하(YS)와 감사(DJ)의 대화를 시작으로 감개무량한 회동이었다. 박지원 당시 당선인 대변인은 “두 분의 회동은 너무 좋았다”며 “서로 격려와 화합하는 자리였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YS는 차기 대통령인 DJ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한보 비리 사태로 구속된 아들 현철씨를 특별사면해 달라는 것이었다. 영부인이던 손명순 여사도 이희호 여사의 손을 잡고 “아들(현철씨)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박지원 의원은 “손 여사는 눈시울을 붉혔으며 이 여사도 아들을 키우는 만큼 이심전심이었다”고 전했다. 김대중 당선인은 YS와 손 여사의 간곡한 요청에 대해 “잘 알았다”며 화답했다.
DJ는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문희상 정무수석과 박주선 법무비서관, 박상천 법무장관에게 김현철씨 특별사면을 지시했다. 그러나 박상천 법무장관은 세 차례나 현철씨의 사면을 강하게 반대했다.
박상천 장관은 DJ의 첫 사면인 1998년 광복절 사면을 앞두고 ‘불법사면은 안 됩니다’란 제목의 보고서까지 DJ에게 올리며 저항했다. 박상천 장관의 ‘장계’를 읽은 DJ는 “박 장관은 왜 안 된다고만 하느냐”고 역정을 냈다. 박 장관의 고집을 아는 DJ는 박 장관을 설득하고자 권노갑 고문까지 법무장관실로 보냈지만 불발됐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박상천 장관 때문에 YS와 좋던 분위기가 깨지게 생겼다”며 아쉬워했다.
DJ는 이때부터 YS로부터 욕을 먹기 시작했다. YS는 “누구는 대통령 안 해봤느냐”며 격분했고, 전직 대통령 초청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다.
DJ는 99년 5월 박상천 법무장관을 바꿨다. 김정길 당시 법무장관 등에게 어떻게든 현철씨를 특별사면시키라고 지시했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현철씨 사면을 위한 ‘부분 사면’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DJ는 1999년 8.15광복절 특사 때 현철씨에 대한 잔여형기 면제를 조치를 내려 석방했고, 2000년 광복절 특사로 복권까지 했다.
DJ는 경실련 등 시민단체로부터 갖은 비판을 받아가며 현절씨에 대한 특별사면을 단행했으나 YS로부터는 고맙다는 말은커녕 독설의 선물만 받았다. YS는 너무 늦게 사면을 해줬다는 이유이고, DJ는 현철씨 사면 때문에 박상천 전 장관과 영원히 갈라서게 됐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이강래 전 수석은 “YS 같았으면 무조건 사면하라고 지시했겠지만 DJ는 참모들이 안 된다고 하면 강하게 밀어붙이는 성격이 아니고 법과 원칙을 가능한 한 지키려 노력하다 보니 늦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양김은 생전에 화해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맞았으나 그 기회조차 무산됐다. 2000년 6월 DJ는 전직 대통령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YS에게 “거산(巨山:YS의 호), 이제 우리 화해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YS는 “그러면 IMF에 대해 후광(後廣ㆍDJ의 호)이 먼저 사과하라. 그러면 화해한다”고 대꾸했다. IMF 사태의 책임을 전부 자신에게 떠넘긴 것을 사과하란 요구였다.
하지만 DJ는 끝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YS는 IMF 청문회를 실시한 것에 대해 아주 불쾌하게 생각했었다. 자신이 경제 관료들과 참모들로부터 보고를 잘못 받은 것은 맞지만 그게 어찌 나만의 잘못이냐는 주장이었다. DJ는 IMF 청문회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양김은 IMF 책임론을 놓고 통 크게 나오지 않았다.
실제로 김대중 정부는 집권 초기에 YS의 상도동계 의원들을 영입하는 대폭적인 정계개편을 착수했다. 문희상 당시 정무수석은 민주화운동 세력을 하나로 묶는 큰 틀의 정계개편을 주장했고, 김중권 당시 비서실장은 DJP 연합이 깨질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며 신한국당 의원들의 빼내오기를 통한 원내 과반 의석을 주장했다.
김중권 실장과 문희상 수석은 정계개편을 놓고 맞섰다. DJ는 정치 현실을 감안해 김중권의 손을 들어줬다. 문희상은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쫓겨난다. 이강래 기조실장이 정무수석으로 영전하고 큰 틀의 정계개편 추진은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없던 일이 됐다.
1987년 후보단일화 문제가 양김을 갈라서게 한 이후 한국 현대사의 두 거목은 진정으로 화해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서로가 서로를 용서하며 사랑하는 모습을 연출하지 못했다. 살아생전에 손을 맞잡는 장면을 국민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형식적인 화해를 하는데 그쳤다.
YS는 병원을 떠나면서 기자들의 “두 분이 화해한 것으로 봐도 되느냐”는 질문에 “이제 그럴 때가 됐지 않았느냐”며 “화해로 봐도 된다”고 고 답했다. YS의 화해 발언이 나온지 8일 만에 DJ는 영면의 길로 떠났다. 그리고 6년 뒤 YS도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