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 망신' 판치는 비정한 APT

관리비 제때 못 내는 것도 서러운데 망신까지…정부는 '나 몰라라'

위 사진은 해당 기사와 관련이 없음 (사진=자료사진)
지난 7일 오후 1140세대가 거주하는 인천의 한 대규모 아파트단지. 세대별 면적이 52㎡(약 16평)에서 69㎡(21평)까지 있는 서민아파트다.

엘리베이터 옆 아파트 현관 게시판에는 '관리비 장기연체 세대 명단 공고'가 붙어있다. 4일자로 붙인 이 공고에는 동과 호수, 연체 개월, 연체 금액이 적혀있다.

◇ "돈 없는데 망신까지…두 번 죽이는 거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릴 때마다 눈에 띄는 이 공고가 주민들에게는 불편한 존재다.

이 아파트에 사는 박모(74) 할머니는 "관리비를 못 낸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망신을 줘 돈을 받아내려는 속셈"이라며 "어린아이를 키우는 집도 있는데 그 속이 얼마나 아프겠냐"고 말했다.

옆에 있던 경비원(63)도 "관리사무소에서 하는 일이라 우린 잘 모른다"면서도 조심스럽게 말을 거들었다.

"없는 사람 심정은 없는 사람이 잘 알죠. 돈이 없어 관리비를 제때 못 내는 것도 서러운데 망신까지 당하니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거죠."

공고에 적힌 '동'과 '호수'를 확인하고 직접 관리비 연체 세대를 찾아가 봤다. 문을 두드리자 잠시 강아지 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20대 여성이 문을 열고 얼굴을 내비쳤다.

"관리사무소의 행태에 불만이 없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빨리 관리비를 내야죠."

집주인은 창피하다는 듯이 서둘러 문을 닫았다.


인천의 서민아파트 가운데 상당수가 관리비 장기연체자들의 동과 호수 등을 게시판 등에 공개해 체납자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사진=변이철 기자)
◇ 관리사무소 "관리비 연체액 계속 늘어…어쩔 수 없어"

관리사무소 측은 입주자대표회의가 입주민 과반수 이상 동의를 얻어 마련한 '공동주택 관리규약'에 따라 관리비 장기연체 세대 명단을 공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 아파트 관리규약 제77조(관리비 등의 체납자에 대한 조치)에는 관리비 등을 3개월 이상 체납한 세대에 대해서는 각 동의 게시판 등에 동, 호수와 체납금액을 게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입주민들이 꼼꼼하게 살펴보고 '아파트 관리규약' 제정하거나 개정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 '체납자 공개 망신 주기'에 과반수가 실제로 동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현재 관리비 연체액이 4,000만 원을 넘어서 독촉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면서 "연체자가 사는 동과 호수를 공개하는 방법은 확실히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연체된 관리비 납부를 독촉하기 위해 동, 호수와 연체금액을 정기적으로 공개하는 아파트는 이곳뿐만이 아니다. 현장을 확인한 결과, 인천지역의 상당수 서민 아파트에서 공통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 명예훼손 요소 많아…정부·자치단체는 '나 몰라라'

시민단체들은 '인권침해와 명예훼손,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등의 요소가 강하다’며 정부와 자치단체들의 적극적인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주거복지연대 남상오 대표는 "관리비를 몇 달 못 낸 것이 죄는 아니다"라며 "그런데도 동, 호수를 공개하는 것은 인격적이나 인권적으로 문제가 많다"라고 말했다.

이상훈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장은 "체납 관리비 징수라는 공익적 목적에 비해 동, 호수가 공개된 체납자 가족들의 고통과 피해가 훨씬 더 커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될 소지가 커 보인다"고 밝혔다.

하지만 인천시 관계자는 "시가 마련한 공동주택 관리규약 준칙에는 '장기 연체 세대 명단 공개'는 들어있지 않다"서도 "입주민대표회의에서 결정한 사항에 대해 직접 개입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나 개인정보 보호 업무를 맡은 행정자치부도 문제점은 인정하면서도 적극적인 대책 마련은 미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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