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오리온과 안양 KGC인삼공사는 다소 아쉽게 4강 플레이오프(PO) 직행이 무산됐으나 악재 속에 선전했다. 서울 삼성은 비시즌 과감한 변화의 결실을 맺었고, 원주 동부는 기둥 뿌리가 뽑혔어도 명가의 자존심은 지켰다.
부산 케이티는 다음 시즌을 위한 가능성을 확인했고, 창원 LG는 김시래의 공백을 메울 후진들을 발굴했다. 서울 SK와 인천 전자랜드는 대변화의 칼을 빼들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10개 구단, 저마다 기쁨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가운데 이번 시즌 정규리그를 요약하는 키워드는 대략 세 가지로 꼽을 수 있다. 신성(新星)과 건재, 그리고 노쇠다. 올 시즌 정규리그를 관통한 단어들이다.
▲'샛별들의 충격 데뷔' 에밋-맥키네스-잭슨
올 시즌 정규리그 최고의 선수는 아마도 KCC 안드레 에밋(191cm)일 것이다. 규정상 MVP는 국내 선수의 몫이지만 에밋의 가치는 외국 선수 이상이다. 수치상 개인 타이틀은 없지만 정규리그 우승팀의 향방을 결정지은 선수가 에밋이었다. 에밋은 우승 결정전이던 21일 KGC 원정에서 30점 10리바운드 5도움의 전방위적 활약을 펼쳤다.
특히 KCC 우승의 결정적인 원동력이 된 막판 12연승 활약이 대단했다. 에밋은 이 기간 평균 32.3점 7.4리바운드 3.2도움의 경이적인 활약을 펼쳤다. 시즌 막판까지 23경기 연속 20점 이상의 엄청난 활약을 펼친 에밋은 득점 2위(25.7점)까지 올랐다. 1위(26.2점) 트로이 길렌워터(LG)보다 3분 정도 적은 경기당 29분25초를 뛰고 올린 수치다.
무엇보다 에밋은 '양날의 검'이라는 한계를 극복해냈다. 시즌 초중반 KCC는 에밋에 대한 득점 의존도가 높다는 지적을 받았으나 트레이드로 활로를 뚫었다. 에밋은 활동 반경이 겹치는 리카르도 포웰이 전자랜드로 가고 허버트 힐이 오자 물 만난 고기가 됐다.
최고의 득점원으로 활약하는 것은 물론 골밑의 하승진, 힐과 외곽의 김효범 등 적재적소에 패스를 빼주며 팀 전체를 움직이는 만능 선수가 됐다.(사실 외국 선수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유일하게 단신을 뽑고 시즌 중 트레이드를 단행한 KCC 사령탑 추승균 감독도 정식 지휘봉을 처음 잡은 새내기다.)
모비스는 리오 라이온스의 부상에도 준우승을 차지했는데 커스버트 빅터(190cm)가 견고하게 지켜낸 골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빅터는 화려하진 않으나 득점 13위(15점) 리바운드 10위(8.5개) 가로채기 3위(1.5개) 블록슛 4위(1.1개)로 견실하게 버텨줬다.
동부가 김주성-윤호영의 부상에도 6강 PO에 진출한 데는 웬델 맥키네스(192.4cm)의 존재가 컸다. 시즌 중반 합류한 맥키네스는 득점 4위(20.5점) 리바운드 8위(8.6개)로 단신 외인 중 왕년 최고였던 조니 맥도웰에 가장 근접한 선수로 꼽혔다. 이밖에도 오리온 가드 조 잭슨(180cm)은 최단신임에도 덩크를 찍는 비인간적 운동 능력과 화려한 패스, 돌파로 리그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노장? 베테랑일 뿐!' 양동근-함지훈-주희정
당초 모비스는 우승 전력에서 살짝 못 미치는 것으로 평가됐다. 사상 첫 3연패를 이룬 주역인 리카르도 라틀리프와 문태영이 삼성으로 이적해간 까닭이었다.
라틀리프는 지난 시즌 에밋 못지 않은 존재감의 외국 선수상을 받았고, 문태영은 올 시즌 포함, 데뷔 후 7시즌 동안 6번이나 국내 득점 1위에 오른 선수였다. 리그 전체 베스트5 후보가 2명이나 빠진 모비스는 타격이 적잖을 것으로 예상됐다. 유재학 감독도 "올 시즌은 6강 PO에 나가면 다행"이라고 엄살(?) 섞인 전망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모비스는 시즌 초반부터 막판까지 줄곧 선두권을 유지했다. 여기에는 10년 안팎 팀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양동근(35 · 181cm)과 함지훈(32 · 198cm)의 건재가 절대적이었다.
30대 중반에 들어선 양동근은 올 시즌도 변함없이 뛰었다. 국가대표 차출로 2라운드부터 합류한 양동근은 평균 36분28초를 소화했다. 이는 2011-12시즌 37분2초 이후 개인 역대 두 번째다. 그러면서 도움왕(5.6개)에 올랐고, 국내 득점 4위(13.6점) 가로채기 6위(1.4개)에 올랐다. 에밋이 외국 선수상을 받는다면 MVP의 몫은 2년 연속 양동근의 차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 시즌 최하위 삼성의 5위 도약은 주희정(39 · 182cm)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주희정은 불혹의 나이에도 도움 8위(3.5개)에 오르는 등 쏠쏠한 역할을 해냈다. 25분 남짓을 뛰면서도 고비마다 송곳 패스와 외곽포를 선보인 주희정에 대해 '최고 가드' 출신 이상민 감독은 "솔직히 주희정이 이렇게까지 해줄 줄은 몰랐다"고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사실 삼성은 라틀리프와 문태영이 왔지만 조력자가 있어야 크게 빛을 보는 선수들이다. 여기에 삼성은 임동섭과 김준일 등 베스트5들이 사실상 처음 손발을 맞추는 터라 초반 경기가 뻑뻑했다. 그러나 주희정의 노련한 윤활유질에 그래도 5위의 성적을 낼 수 있었다. 모범적인 생활과 야간 훈련 등 후배들을 이끄는 귀감 역할도 주희정이 빛나는 이유다.
▲'노쇠냐, 불운이냐' 쓰러진 헤인즈-김주성
사실 올 시즌 정규리그 우승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선수는 어쩌면 에밋이나 양동근이 아닐 수도 있다. 1, 2위가 아닌 3위 오리온의 에이스 애런 헤인즈(199cm)일 수 있다. 헤인즈의 존재 여부에 따라 우승팀이 갈린 탓이 큰 까닭이다.
당초 오리온은 올 시즌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혔다. 이승현, 문태종, 김동욱, 허일영, 김강선 등 포워드 왕국에 리그 최고의 득점원 헤인즈가 가세한 오리온이었던 까닭이다. 실제로 오리온은 시즌 시작부터 1위를 꿰찼고, 18승3패의 경이적인 기록을 내기도 했다. 헤인즈가 중심이었다. 헤인즈는 1, 2라운드 연속 MVP에 오르며 상승세를 이끌었다.
하지만 헤인즈의 부상 이후 오리온은 주춤했다. 지난해 11월 15일 KCC전에서 헤인즈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오리온은 11승13패로 허덕였고, 선두를 뺏겼다. 그 사이 헤인즈는 12월25일 복귀전인 SK전에서 이번에는 발목 부상을 입어 쓰러졌다.
다만 헤인즈는 SK에서 뛰던 지난 시즌 6강 PO 때도 부상을 입어 2, 3차전을 뛰지 못했다. 최근 잦은 부상이 불가항력적인 운 때문인지 노쇠화 기미 때문인지는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특히 남은 PO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동부 김주성(37 · 205cm)의 부상도 뼈아팠다. 팀의 정신적 지주인 김주성은 새해 첫 날 하필 불운을 겪었다. 삼성전에서 팀 동료 두경민과 부딪혀 왼 무릎 인대 손상을 입어 50일 가까이 자리를 비웠다. 여기에 동부는 윤호영(32 · 197cm)까지 허리 부상으로 쓰러져 동부산성이 무너질 뻔했다. 4강 직행도 노렸던 동부는 그나마 맥키네스가 골밑을 지켜 봄 농구는 치를 수 있게 됐다.
결과론이지만 헤인즈, 김주성 등이 건재했다면 리그 선두권의 주인은 다른 팀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부상 없이 주축들이 건재했던 팀이 좋은 성적을 낸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제 부상병들은 대부분 돌아왔다. 과연 올 시즌의 마지막 농사인 봄 농구에서는 어떤 결과론이 나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