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손숙 "박근혜 대통령도 이 영화 봤으면…"

[노컷 인터뷰] 50년 내공 배우가 고백한 '귀향'으로의 여정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영화 '귀향' 출연배우 손숙.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50여 년 세월을 무대에서 살았고 지금도 무대에서 살고 있다. 관록이 지긋한 배우 손숙은 오랜만에 영화 '귀향'으로 관객들과 만났다. 몇 없는 영화 필모그래피 속에서 남다른 존재감을 뽐냈던 그는 이번에도 역시 사회를 향해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를 선택했다.

마치 나비처럼, 그렇게 '귀향'은 손숙에게 날아 들었다.

"느닷없이 감독이 시나리오를 보냈더라고. 조정래라고 그러는데 소설 '태백산맥' 때문에 익숙했지. 시나리오 읽고 그렇게 울어보기는 또 처음이었어. 바로 감독한테 연락해서 만났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10년 째 이 영화를 하려고 한다는 거야. 투자사를 찾지 못해서 제작이 힘든데 그래도 꼭 만들고 싶다, 선생님이 출연해주셨으면 좋겠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제가 하자고 했어요."


처음에는 '과연 이 영화가 제작이 될까' 의문이 들었다. 아시다시피 투자가 완벽하게 되고, 심지어 촬영까지 끝나도 종종 영화가 엎어지곤 하기 때문이다. 손숙에게 출연을 약속 받았지만 여전히 촬영은 시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대신 조 감독은 1년 반 동안 한 무리의 소녀들을 이끌고, 손숙이 서는 연극무대를 찾아왔다.

"사실 영화 촬영이 마음이나 의욕만 갖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약속 이후 1년 반이 지나서 저는 속으로 '안되나보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가끔씩 애들을 우르르 몰고 나타나. 감독이 그렇게 애들을 훈련시켰어요. 어느 날 2억을 구했다면서 촬영을 해야 된다고 스케줄 이야기를 하더라고. 나는 그 때까지도 반신반의 했지. 마음이 지극정성이라 그런지 신기하게 조금씩 뭔가 풀려가더라고요. 저는 그걸 기적이라고 해요."

유명한 스태프들이 재능기부를 자처했고, 한 대학에서는 세트장 지을 장소를 무료로 제공했다. 손숙은 아직도 위안소 세트장에 감돌던 냉기가 생생하다. 제작비는 끊이지 않는 샘물같이 떨어지면 모이고, 떨어지면 또 모였다. '귀향' 스태프들은 그렇게 갖은 고생 끝에 촬영을 이어갔다.

"애들은 아주 똘똘 뭉쳐있었지. 1년 동안 감독이 데리고 다녔으니 말할 것도 없죠. 이상하게 그 위안소 세트장 근처만 가면 온도가 2도 정도 떨어져요. 스태프들도 가기 싫어하고 애들도 촬영 아니면 안 가려고 그래. 무서워 하더라고요. 그런 기운이 있었어요. 지하에서 한 한달 촬영했나? 어느 날 촬영에 갔더니 제작비가 떨어졌대. 그런데 하루 지나서 또 어디서 돈이 들어왔다는거야. 계속 그렇게 갔어요. 그렇게 모인 게 12억인가 그래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영화 '귀향' 출연배우 손숙.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애초에 출연을 약속했을 때부터 손숙은 출연료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조정래 감독이 자신에게 가감없이 도움을 요청하길 바랐다.

"출연료 달라는 소리를 그 앞에 대고 어떻게 해요. 보면 감독이 너무 나한테 미안해 해. 도와달라는 말도 못하고…. 그냥 영화가 잘되면 러닝 개런티를 받기로 했어요. 받아서 기부하기로. 그러니까 관객들이 많이 들어왔으면 싶죠."

손숙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인연은 '귀향'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종종 수요집회에 나가 목소리를 보태기도 했다. 손숙 세대에게 '위안부 문제'는 그리 멀지도, 낯설지도 않은 일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관심이 없을 수가 없지. 그 전에는 수요집회도 나가고 했는데 오히려 영화를 찍으면서 할머니들을 만나 뵙지 않았어요. 연기는 연기대로 가야 하는데 다른 생각을 할 것 같아서. 남의 일이 아닌게 만약 해방이 20년 늦었다면 우리 세대도 끌려갈 수 있었어요. 그 때 태어난 소녀들이 무슨 죄야…."

촬영도 힘들었지만 보는 것은 더 힘들었다. 손숙이 이야기하는 '힘듦'은 단순히 육체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귀향'이 내포한 슬픔은 온 몸으로 아프게 전이됐다.

"후원자 시사회를 한다고 여러 번 스케줄을 보내줬는데 안 갔어요. 어떻게 영화를 봐야 되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결국 봤는데 그날 저녁에 몸이 너무 아팠어요. 눈물도 안 나. 그냥 가슴이 답답하고 온 몸이 아파. 그래서 보는 게 힘들어요."

손숙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은 참상 중 아주 일부분 밖에 보여주지 않았다"는 감독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런 연출 덕분에 '귀향'이라는 영화가 '진혼제'로 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도 거짓말이 없어요. 과한 게 아니라 감독이 굉장히 절제한 겁니다. 제가 감독한테 이야기했어요. 지옥 같은 상황들을 너무 노출시키지 말고, 절제해서 만들자. 그게 맞는 것 같았어요. 후손으로서 그 분들이 고향에 오시도록 해야 하니까. 나는 젊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저런 일이 있었고, 다시는 없어야 된다는 것을 봤으면 해요. 외면해서 될 일은 아니에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영화 '귀향' 출연배우 손숙. (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손숙은 '귀향'이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위안부' 피해국인 우리나라가 영화 개봉 여부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도 이상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심지어 대통령까지도 봐야 할 영화이기 때문이다.

"어떤 정치적인 의도로 촬영한 영화가 아니야. 한일 사이에 협상이 이뤄질 것이라고 상상도 못하고 찍었지. 개봉 시기가 비슷했을 뿐인데 그것과 '귀향'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어.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개봉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이야기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가요. 개인적으로는 대통령도 보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일본 정부만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한국인들 중에서도 '전쟁 중 여자나 어린이 등 약자에게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었으니까. 손숙은 그들에게 따끔한 한 마디를 남겼다.

"그렇게 말하는 우리 국민이 있다는 게 기가 막히죠. 조국이 있는데 ('위안부' 피해자들을) 그렇게 내팽개치는 건 아니지 않나요? 6.25 전쟁 때 우리 엄마들은 얼굴에 숯칠을 하고 도망갔어요. 혹시라도 군인들한테 눈에 띄어서 험한 일이라도 당할까봐. 그런 게 전쟁입니다. 어떤 명분이 있더라도 인간성을 파괴하는 전쟁은 하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귀향' 소식을 듣고 주변에서는 갖은 걱정을 건네왔다. 그러나 손숙은 지금도 일본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재일교포 배우들에 대한 걱정을 지울 수가 없다. 그 중에서도 주연 정민 역을 맡은 10대 강하나 양에 대한 걱정이 가장 크다.

"누가 나한테 이 영화 찍으면 일본 못 갈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 나야 안 가도 괜찮은데 재일교포 배우들은 신상이 털리기도 하나 봐요. 강하나 양은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이고, 주연급에는 재일교포 배우들이 4명이나 있어요. 그런 것을 감안하고 다들 출연한 거죠. 그 배우들이 열 일 제쳐놓고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뭔가 사명감이 있었나봐요. 부디 일상에 지장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냥 직업이니까 계속 무대에 올라 연기하는 것. 손숙에게 연기란, 배우라는 직업이란 그런 존재다. 동시에 분명한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부산국제영화제 외압 논란을 보면 왜 그런 걸 간섭하는지 모르겠어요. 항상 보면 옛날보다 못한 것 같아. 정체가 없는 것에 이상하게 길들여져서 미리 겁 먹고, 묘하게 말려서 스스로 조심하게 만드는 그런 분위기예요. 나도 옛날에는 한 가닥했는데 이제 그런 패기가 없네. 옛날에는 우리가 앞장 서서 사회 문제도 이야기하고 그랬는데, 요즘 젊은 친구들이 그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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