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몰볼이 대세 아닌가?" 추일승, 우승을 설계했다

29일 오후 경기도 고양체육관에서 열린 KCC 프로농구 챔피언 결정전 6차전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와 전주 KCC 이지스의 경기에서 오리온 추일승 감독이 허일영의 3점슛 성공에 환호하고 있다 (사진 = 박종민 기자)
)프로농구 외국인선수 트라이아웃이 열렸던 지난해 7월22일, 고양 오리온 추일승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추일승 감독은 드래프트를 마치고 미국 라스베이거스 공항으로 이동해 귀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서울 삼성이 전체 1순위로 리카르도 라틀리프를 뽑았고 전주 KCC가 이미 그때부터 화제의 단신 외국인선수였던 안드레 에밋을 뽑았지만 선수 선발의 의도가 가장 궁금했던 팀은 오리온이었다.

오리온은 센터를 뽑지 않았다. 1라운드에서 포워드 애런 헤인즈를 뽑았고 2라운드에서는 가드 조 잭슨을 지명했다. KCC도 센터를 뽑지 않았지만 오리온이 더 파격적이었다. 조 잭슨은 무려 16년 만에 선발된 외국인 포인트가드이기 때문이다.

센터를 지명하지 않은 이유, 외국인 포인트가드를 파격적으로 선택한 이유 등을 물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전화 통화를 그만해야 할 타이밍이 왔다. 추일승 감독은 마지막으로 기자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스몰볼이 대세 아닙니까?"

전화기 너머 들려온 목소리만 듣고도 그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여유있는 표정으로 웃고있는 얼굴이.

추일승 감독은 그때부터 2015-2016시즌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작지만 세밀하다

세밀한 작전 야구를 보통 '스몰볼'이라고 부른다. 농구에도 '스몰볼'의 개념이 있다. 전통적인 포지션 개념에서 벗어나 작고 빠른 선수들로 라인업을 채우는 것이다.

정통 빅맨을 빼고 포워드와 가드로 5명을 채우거나 정통 빅맨 한 명에 스몰포워드와 가드로 나머지 자리를 채우는 방식이다.


'스몰볼'을 시도하면 높이는 낮아진다. 대신 스피드와 활동량을 얻는다. 수비에서는 끊임없는 스위치가 가능해진다. 상대의 공간을 좁힐 수 있다. 공격에서는 활발한 움직임과 외곽 공세를 펼칠 수 있고 속공의 질도 높일 수 있다.

세계 농구는 '스몰볼'이 대세다. 국제농구연맹(FIBA) 무대에서는 오래 전부터 포지션 파괴의 바람이 불었고 미국프로농구(NBA)에서는 마이애미 히트가 승부처에서 스몰포워드 르브론 제임스를 파워포워드로 배치해 재미를 봤다. 최근에는 '스몰볼'의 완성형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가 리그를 평정하고 있다.

현대 농구는 포스트업보다 2대2 공격을 선호하는 쪽으로 흐름이 변했다. 포스트업을 막을 수 있는 수비 전술은 점점 더 세밀해지는 2대2 공격에 대한 대처법보다 만들기가 용이하다.

오리온은 올 시즌 프로농구에서 현대 농구의 흐름에 가장 가까운 플레이를 시도한 팀이다.

◇오리온은 작아도 작은 게 아니다

오리온은 정통 센터를 뽑지 않았다. 이승현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시즌 중반에 합류한 장재석이 이승현을 도왔다. 오리온에서 정통 빅민이라 볼만한 선수는 둘 뿐이었다. 둘 다 외국인 센터들과 비교해보면 높이 경쟁이 쉽지만은 않은 선수들이다.

대신 오리온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높이'가 있었다. 포워드들이 많아 슈팅가드부터 파워포워드까지 2-4번 라인의 높이가 타팀을 압도하고도 남는 것이다. 헤인즈와 김동욱, 허일영, 문태종 등 윙 플레이어들은 2-4번 포지션을 나누어 맡았다.

2-4번 라인의 높이가 비슷하면 '무한' 스위치 수비가 가능하다. 미스매치가 걱정되면 스위치를 못한다. 오리온은 주저없이 스위치를 해 빈 틈이 생기는 것을 막았다.

한 구단 관계자는 "김동욱이 이번 시즌 스위치 수비의 열쇠였다"고 말했다. 김동욱은 상대 가드보다는 느리지만 스피드가 크게 떨어지지는 않고 상대 빅맨을 막을 정도로 힘이 세진 않지만 힘에서 크게 밀리지도 않는 선수다.

오리온의 '높이'는 챔피언결정전에서 빛을 발했다. 추승균 전주 KCC 감독은 챔피언결정전 도중 "골밑은 우리가 높지만 상대 포워드들의 키가 커서 밖으로 나오는 리바운드를 많이 빼앗기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오리온은 이렇게 센터없는 수비의 약점을 메웠다. 그리고 공격에서의 장점을 마음껏 누렸다. 오리온의 공격 템포는 어느 팀보다 빨랐고 유기적인 움직임에서 비롯되는 외곽 공세에 상대 팀들은 쩔쩔 맸다.

조 잭슨의 영입은 기막힌 한수였다. 추일승 감독은 조 잭슨이 리그에 적응을 하지 못한 시기에도 그에 대한 믿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조 잭슨을 지명하고 "신장의 핸디캡이 있는데 실력으로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고 본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믿음의 씨앗은 시즌 중반 이후 달콤한 열매로 돌아왔다. 그는 KCC의 에밋만큼이나 1대1로는 막을 수 없는 선수로 성장해 오리온의 주무기가 됐다.

◇우승의 한을 푼 추일승 감독

2003년 여수 코리아텐더의 사령탑을 맡아 프로농구 감독으로 데뷔한 추일승 감독. 부산 KTF를 이끌고 울산 모비스와 7차전 혈투를 벌였던 2007년 챔피언결정전은 지금도 명승부로 회자된다.

이후 오랫동안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2011년 오리온의 지휘봉을 잡고 매시즌 정상에 도전했으나 우승으로 가는 길은 멀기만 했다.

올 시즌만 해도 그렇다. 시즌 초반 애런 헤인즈와 탄탄한 포워드진을 앞세워 승승장구했다. 모두가 예상한 우승후보다웠다. 그러나 헤인즈가 다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우승의 꿈은 그대로 사라지는듯 보였다.

그러나 추일승 감독에게는 확실한 철학이 있었다. 시즌 중반 팀이 이도저도 아닌 상황에 처하자 당시 천덕꾸러기였던 조 잭슨을 전폭적으로 밀어줬다.

경기에서 져도 어쩔 수 없다, 차라리 잭슨의 자신감이라도 키워주자는 생각으로 경기에 나섰고 잭슨은 믿음에 보답했다. 잭슨의 도약은 오리온에게는 전환점이 됐다.

추일승 감독은 체계적인 준비와 위기 대처 능력으로 오리온을 정상으로 이끌었다. 오리온은 김승현과 마르커스 힉스가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던 2002년 이후 처음이자 통산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오리온도, 추일승 감독도 한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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