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놓친 실제 '인천상륙작전' 그리고 맥아더

석학 윌리엄 스툭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에게 매우 개인적인 승리였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를 연기한 할리우드 배우 리암 니슨(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올여름 극장가에서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흥행하면서 한국전쟁 당시 전세를 바꾼 인천상륙작전과 이를 이끈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1880~1964)에게 대중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국전쟁을 깊이 연구해 온 석학으로 꼽히는 미국의 역사학자 윌리엄 스툭 조지아대 교수는,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사료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국제적 시각을 담은 저서 '한국전쟁과 미국 외교정책'(나남·2005)을 펴냈다. 그의 전작 '한국전쟁의 국제사'(푸른역사·2001)가 한국전쟁의 국제적 의미를 자세히 서술했다면, 이 책은 당대 주요 외교·정치·전략 이슈를 중심으로 보다 종합적인 차원에서 한국전쟁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다.


스툭 교수는 이 책에서 1950년 9월 15일 수행된 인천상륙작전 이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쟁 전 남한의 게릴라 진압작전에서 살아남은 빨치산들의 비밀활동에 도움을 받아 북한은 8월초 남동쪽 해안도시인 부산으로부터 겨우 30여 마일 떨어진 낙동강까지 진격했다. 미군과 한국군은 적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하고 미군 비행기가 하늘을 지배했지만 당시 북한군은 무기가 더 뛰어났고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공군력은 한국의 장마철 구름 낀 하늘에선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8월 말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을 전면 공격했고 2주 동안 지속된 전투에서 미군은 같은 기간 그 어떤 전쟁에서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냈다." (120쪽)

그러나 북한군의 상황도 그리 녹록지는 않았고, 이러한 상황에서 인천상륙작전이 수행됐다고 지은이는 전한다.

"지난 두 달간 미국은 한국과 일본에서 전력과 군인을 보충한 반면 북한군은 5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북한은 바로 군대를 충원할 수 없었고 또 빼앗기고 파괴된 무기와 써버린 화약을 모두 보충할 수 없었다. 날씨가 맑아져 유엔군이 하늘과 바다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자 북한군의 길어진 병참보급로는 점점 더 골칫거리가 되었다. 9월 15일, 유엔군은 북한이 긴장을 늦추고 있을 때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유엔군은 4일 만에 서울 외곽의 김포공항을 점령했다. 1주일 후, 수도 서울을 수복했다. 한편 유엔 제8군은 부산에서 적군의 전선을 뚫고 북쪽으로 빠르게 진격하고 있었다." (120, 121쪽)

◇ "맥아더, 상당히 정치적인 군인이었다는 점 기억해야"

영화 '인천상륙작전' 스틸컷(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무엇보다 스툭 교수는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맥아더에게 매우 개인적인 승리였다는 것"이라고 전한다.

"인천 앞바다는 수로가 좁고 구불구불하며 해류가 강하고 세계에서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큰 곳 중 하나이다. 미 합참은 지형적 특징 때문에 이곳을 상륙지점으로 정하는 데 반대했다. 게다가 전선에서 워낙 북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유엔군이 설사 상륙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고립되어 적군에게 괴멸당할 위험이 컸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 계획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주장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장소이므로 기습공격이 가능한데다 북한 주력부대를 광범위하게 포위함으로써 38선 위로 올라가는 퇴로를 차단할 수 있다며 반대파를 설득했다." (131쪽)

이러한 맥아더의 설득은 결국 먹혀들었다. 그 이유를 스툭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맥아더의 화려한 군 경력과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자신감, 또 군사작전에서 현지사령관에게 상당한 재량권을 인정하는 전통 덕분에 결국 인천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워싱턴의 고위관료들은 맥아더의 전략을 승인하고 나서도 불안감을 버리지 못했다. 인천상륙작전이 놀라운 성공을 거두자 그들은 그의 판단에 당분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131쪽)

이어 지은이는 "두 번째 기억해야 할 사실은 맥아더가 상당히 정치적인 군인이었다는 점"이라고 쓰고 있다.

"그(맥아더)는 1948년 위스콘신주 공화당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후보로 출마했다. 열렬한 아시아 우선주의자였던 그의 견해는 국회의원 선거전에서 트루먼 행정부의 동아시아 정책을 공격하려던 공화당에게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공화당의 공격은 1년 이상 계속되었다. 공산당이 중국 본토를 장악한 가운데 트루먼 행정부는 이 지역에 더 깊이 개입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중략) 인천상륙작전 후 맥아더를 저지하려던 사람은 거만한 맥아더 장군의 공개적 비난과 민주당에게 불리한 상황에서 신랄한 공화당의 공격을 견뎌야만 했다." (133쪽)

◇ "한국전쟁은 제3차 세계대전의 대리전"

영화 '인천상륙작전' 스틸컷(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우여곡절 끝에 성공한 인천상륙작전은 "(연합군의) 공격적 행동에 상당한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 스툭 교수의 분석이다.

"이제 더 이상 천천히 원칙적으로 많은 비용을 치르며 적을 물리치는 전쟁이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아군 측 인명과 무기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전세를 뒤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재빨리 적을 밀어붙일 경우 인천은 적은 비용으로 신속하고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듯했다." (133쪽)

그러면서도 지은이는 맥아더에 대해 "1950년에 70살이었던 맥아더 주변에는 감히 그의 자기숭배 세계를 방해할 사람이 거의 아무도 없었다"고 전한다. 한국전쟁을 장기화 국면으로 몰아넣은 요인 중 하나로 꼽히는 중국의 개입이 있기 전 "절대 그런 일 없을 것"이라던 맥아더의 단언이 빗나간 데도 그의 이러한 성향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1950년) 11월 초, 맥아더의 성격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유엔군은 여러 부대에서 중공군 포로를 붙잡아 심문했다. 그 결과 대규모 중공군의 개입이 진행 중이라는 분석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령관 주변의 분위기 때문에 그 분석결과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던 것 같다. (중략) 한국사령부의 몇몇 장교들이 중국의 대규모 개입에 깊은 우려를 표시했지만 윌러비는 이를 가장 잘 알아야 할 자신의 상사인 맥아더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맥아더를 설득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자신의 공격계획을 포기하라고 했다면 아예 말을 듣지 않았을 수도 있다." (151, 152쪽)

스툭 교수는 이 책의 서문에서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을 두고 '3차 세계대전의 대리전'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한국전쟁은 냉전을 종식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긴장을 고조시키고 군사력을 증강시켰다"는 것이다.

"전투는 확전 되지 않고 한반도 국경 안에서만 치러졌다. 미국과 소련이 각각 한국에 있는 자신의 대리정부가 한반도를 통일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데다가 막대한 전쟁비용 부담과 위험 때문에 남북한 모두 군사적 수단으로 상대방의 영토를 점령하려는 야욕을 접어야 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과 서유럽이 재무장하면서 열강들의 주요 접전지에서 어느 정도 군사적 힘의 균형이 상당기간 유지될 수 있었다. 미국과 소련, 그리고 그들의 우방국들이 전보다 군사력이 강화되면서 오히려 직접적 무력충돌로 치닫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9, 10쪽)

그는 특히 책의 말미에서 한국전쟁의 복잡다단한 양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한국전쟁은 수세기 동안 기술발전의 물결에 힘입어 주요 제국주의 국가들을 자신의 진영에 귀속시키는 데 성공한 서방세계의 지도자들과 이제 민족주의의 발호로 기존의 권력구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애쓰고 있는 과거 식민지 세계의 대표들 간의 충돌이었다. 또 현상유지나 진화적 변화를 추구하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세계의 리더와 부패하고 착취적이며 욕심이 지나친 제도를 타도하려고 노력하는 전제적 사회주의 세력 간의 정면 대결이었다. 이들의 괴리가 얼마나 깊었는지는 양측이 기존의 군사적 균형에 동의한 후에도 정말로 전쟁이 끝나기까지 걸렸던 그 긴 시간이 설명해 준다" (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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