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스릴러' 108년 염소의 저주 마침내 깼다

시카고 컵스, 클리블랜드 누르고 '순종 2년' 이후 첫 월드시리즈 우승


1945년 미국 시카고 리글리필드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4차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맞선 홈팀 시카고 컵스를 응원하기 위해 야구장을 찾은 빌리 시아니스는 평소 가족처럼 아끼는 염소 '머피'를 데리고 갔다. 염소를 위한 티켓도 샀다. 그런대 냄새가 난다는 팬들의 항의로 '머피'는 야구장에서 쫓겨났다.

열받은 빌리 시아니스는 시카고 컵스가 다시는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당시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런데 시카고 컵스의 우승 근처에도 가지 못한 시즌이 거듭되자 사람들은 이를 두고 '염소의 저주'라 불렀다.

2003년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 '염소의 저주'가 다시 부각됐다. 시카고 컵스는 플로리다 말린스에 3승2패로 앞서있었고 6차전에서도 3-0 리드를 잡고 있었다.

8회에 플로리다 내야수 루이스 카스티요가 좌측 방면 파울 타구를 날렸다. 공은 담장 바로 앞 파울 지역을 향해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고 시카고 컵스 좌익수 모이세스 알루가 공을 잡기 위해 뛰어갔다. 그런데 관중석에 앉아있던 스티브 바트먼이 파울 타구를 잡아버렸다. 알루는 불같이 화를 냈다. 야유가 쏟아졌다.

놀랍게도 시카고 컵스는 8회에 8점을 내주며 역전패를 당했다. 3승3패 균형이 맞춰졌고 플로리다가 7차전을 승리하면서 시카고 컵스는 또 한번 월드시리즈 문턱에서 좌절했다. 이후 스티브 바트먼은 온갖 협박에 시달렸다. '염소의 저주'와 더불어 시카고 컵스의 징크스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이름이 됐다.

시카고 컵스가 마지막으로 월드시리즈를 제패한 해는 1908년이다. 국내 팬들은 "조선시대 순종 2년 이후 우승이 없다"며 시카고 컵스의 비운을 재치있게 표현한다. 순종 2년이라 하니 정말 멀게만 느껴진다.

메이저리그에는 '염소의 저주'보다 유명한 저주가 있었다. 바로 '밤비노의 저주'다. 밤비노는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한명인 베이브 루스의 별명. 보스턴 레드삭스는 1920년 간판스타 베이브 루스를 라이벌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했는데 공교롭게도 베이브 루스가 떠난 이후 한동안 우승이 없었다.

2004년 월드시리즈 정상에 서기 전까지 1918년이 마지막 우승이었다. 무려 86년만에 '밤비노의 저주'를 깬 것이다.

당시 보스턴의 단장은 테오 엡스타인. 2002년 말 만 28세의 나이로 단장에 취임했다. 통계를 바탕으로 그가 영입한 선수들은 줄줄이 대박을 터트렸다. 결국 '밤비노의 저주'를 깼다.

엡스타인은 2011년 시카고 컵스의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주 브레이커'가 나타난 것이다. 엡스타인 사장은 체계적인 리빌딩을 통해 매년 시카고 컵스의 전력을 향상시켰다. 지금 주축 멤버로 뛰고 있는 크리스 브라이언트, 하비에르 바에즈, 카일 슈와버 등을 드래프트로 뽑았고 앤소니 리조, 애디슨 러셀, 제이크 아리에타 등 영입한 선수들 다수가 성공을 거뒀다.


엡스타인 사장이 주도한 리빌딩은 2016년 꽃을 피웠다. 팀은 103승58패를 기록해 정규리그 전체 승률 1위를 차지했다. 71년만에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순종 2년 이후 처음으로, 무려 108년만에 우승할 기회를 얻었다.

과정은 쉽지 않았다. 상대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테리 프랑코나 감독의 능수능란한 투수 교체와 용병술이 아무도 우승후보로 꼽지 않았던 클리블랜드를 월드시리즈 무대로 이끌었다. 프랑코나 감독은 엡스타인 사장이 '밤비노의 저주'를 깰 당시 보스턴의 사령탑이었던 진정한 '저주 브레이커'였다.

클리블랜드도 시카고 컵스 못지 않게 우승이 간절했다. 1948년 우승이 마지막이다. 68년만에 정상을 노렸다.

기세가 맹렬했다. 클리블랜드는 리글리필드 원정 3경기 중 2경기를 잡는 등 4차전까지 3승1패로 앞서갔다. 클리블랜드 역시 '와후 추장의 저주'로 불리는 저주와 싸웠다. 1951년 구단 마스코트인 와후 추장의 색깔을 노란색으로 빨간색으로 바꿨다가 인종 차별 논란을 일으키면서 저주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그러나 클리블랜드가 우승을 눈앞에 두자 역시나 '염소의 저주'가 더 깨기 어려운 것 아니냐는 말이 나돌았다.

그러나 시카고 컵스는 차분하게 반격했다. 에이스 존 레스터를 앞세워 5차전을 잡았고 폭발적인 타격에 힘입어 원정 6차전을 잡았다. 3승3패 동률에서 마지막 7차전이 3일(한국시간) 미국 클리블랜드 프로그레시브필드에서 열렸다.

온갖 저주가 뒤섞인 마지막 경기답게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시카고 컵스의 1번타자 덱스터 파울러는 1회초 코리 클루버를 상대로 솔로홈런을 쳤다. 월드시리즈 7차전 역사상 최초의 리드오프 홈런.

▲러셀은 4회초 희생플라이로 월드시리즈 9번째 타점을 올렸다.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아본 만 22세 이하 선수 가운데 러셀보다 많은 타점을 기록한 선수는 없다.

▲클리블랜드가 상대 폭투에 편승해 2점을 뽑은 다음 이닝인 6회초. 공을 놓쳤던 포수 데이비드 로스는 깜짝 솔로홈런을 때렸다. 만 39세228일만에 월드시리즈 통산 첫 홈런을 기록했다.

▲코리 클루버도, 앤드류 밀러도 무너졌다. 클루버와 밀러의 7차전 이전까지 포스트시즌 총 실점은 각각 3점과 1점. 그런데 7차전에서는 각각 4점과 2점을 내줬다.

▲클리블랜드 중견수 라자이 데이비스는 통산 장타율이 0.387에 불과한 타자다. 그가 4-6으로 뒤진 8회말 '파이어볼러' 아돌리스 채프먼을 상대로 동점 투런홈런을 때렸다. ESPN은 '데이비스의 홈런 비거리는 110m. 만약 리글리필드였다면 홈런이 될 수 없는 비거리'라고 전했다.

시카고 컵스가 6-3으로 앞서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염소의 저주'가 드디어 깨지는듯 했다. 그러나 8회말 데이비스의 동점 투런홈런을 포함, 3점을 내주면서 6-6 동점이 됐다. 저주는 이처럼 무서웠다.

승부는 연장전으로 접어들었다. 월드시리즈 최종전 사상 역대 5번째 연장 승부. 지난 4번 모두 홈팀이 이겼다.

이번에는 달랐다. 시카고 컵스는 연장 10회초 벤 조브리스트와 미겔 몬테로의 적시타로 2점을 뽑았다. 10회말 또 데이비스에게 적시타를 얻어맞아 1실점했지만 추가 실점은 없었다.

결국 시카고 컵스가 8-7로 승리하면서 지긋지긋한 108년의 저주를 끊어냈다. 시카고 컵스로서는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을 때까지도 안심할 수 없었던 한편의 스릴러였다.

클리블랜드는 다음을 기약하게 됐다.

클리블랜드가 올해 이전에 마지막으로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던 것은 1997년. 그때도 7차전 승부가 펼쳐졌다. 그때도 연장전 승부가 펼쳐졌다. 연장 11회말 에드가 렌테리아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고 2-3으로 졌다. 19년이 지나 또 월드시리즈 최종전 연장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르브론 제임스가 이끄는 미국프로농구(NBA)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는 올해 NBA 파이널에서 정규리그 최다승(73승19패)을 올린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를 꺾고 우승했다. 1승3패 열세에서 내리 3연승을 거두는 기적을 썼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도 리그 최다승 팀을 만났다. 캐벌리어스와는 반대로 3승1패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와후 추장의 저주는 계속 된다.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