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모 집회' 현장서 만난 어느 70대 노병의 이야기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4차 촛불집회가 열린 19일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와 보수단체 회원들이 박 대통령 하야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
19일 오후, 그 노병을 처음 본 건 이날 서울역 광장에서 열리는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등 보수단체들의 '박근혜 대통령 퇴진 반대' 집회 현장에 가는 길이었다. 지하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서울역으로 가는 4호선 열차를 타기 위해 이동하던 중 접한, 두터운 국방색 점퍼와 검정 바지를 입고 빨간 모자에 굵은 테 선글라스를 착용한 그의 모습은 뭇사람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붐비는 지하철의 같은 칸에 탄 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투정을 부리는 예닐곱 살 아이들에게 자못 인자한 투로 "그래 그래, 맘껏 해라"라는 말을 건넸지만, 그의 복장에서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낀 듯한 아이들은 순간적으로 경직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예상대로 서울역에서 하차했다. 이날 오후 2시부터 예정된 보수단체 집회가 시작되기 약 30분 전이었다. 서울역 광장 초입에서 소속과 이름을 밝힌 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는 "행사(집회)도 하기 전에 (인터뷰를) 하는 건 (주최 측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이어지는 물음에 적극적으로 답하는 열의를 보였다. 무의식적인 것인지,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는 그의 어투는 몹시 흥미로웠다.

그는 "1947년생으로 올해 70세"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이름은 밝히기 꺼려했지만 "성은 남 씨"라고 알려줬다. 남 씨가 쓴 빨간 모자의 측면에는 '박해모봉사단'이라고 적혀 있었다. "박근혜를 사랑하는 해병대 모임 봉사단"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박해모는) 순수 봉사단체로 교통정리도 해"라며, 대뜸 "나는 지금까지 돈 10원도 받은 적이 없어요"라고 강조했다.

'오늘 집회에 어떻게 참가하게 됐나'라는 물음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가정과 사회가 다를 게 없잖아. 가정보다 더 큰 것이 사회고, 사회보다 더 큰 것이 나라란 말이야. 일개 가정에서조차도 이런 의견 충돌이 생기면 아무 것도 안 돼요. 더 나아가서 국가도, 나라도 마찬가지가 되니까. 이건 아니지. 이래선 안 돼. 순리로 풀어야지."

남 씨가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광화문 촛불집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안 것은 다음에 이어진 "(광화문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을) 전부 동원한 게… 뭐 그런 것은 확인은 안 됐지만 지난번에 100만 명이 모인 게 정당이 (주도)했으니까"라는 말 때문이었다.

'광화문 촛불집회 인원을 강제동원했다는 것은 개인적인 생각이냐'고 묻자 그는 "그날 내가 현장에 가봤어. 버스가 200대씩 지방에서 오면 그게 동원 아니면 말이 돼? 솔직하게 이건 아니지"라고 답했다.


남 씨는 스스로를 '꼴통 보수'라고 했다. "국가를 위하는 월남 참전자요, 좌파나 종북세력이 얘기하는 꼴통 보수라고 나는 자부한다"는 것이 그의 표현이다.

"나보고 꼴통 보수라고 하는데, 내가 거기다 대고 '꼴통보수 아니'라고 얘기를 못하잖아. 내가 청룡부대 출신인데, 20대 전우 두 사람이 내 무르팍에서 죽어가면서 한 말이 있어. '내 엄마, 아버지한테 내가 여기서 죽었다고 얘기 좀 해달라.' 이게 내 무르팍에서 죽어간 두 사람의 얘기야."

남 씨에게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박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데, 박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내려놓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혼란이 있다고 생각해. 귀신이 아니니까 나도 잘 모르겠네"라고 답했다. '지금 박 대통령이 무리하게 자리를 유지하려 하면서 생기는 혼란은 없다고 보나'라는 물음에는 아래와 같이 답했다.

"있다고 보면… 그것은 일장일단이 있다고 봐. 이런 식(퇴진 촉구)이 아니고, 정상적인 절차에 의해서 했으면 우리도 이런 집회를 왜 하겠어. 이게 전부 돈이잖아, 돈."

'돈'을 강조하는 그에게 '오늘 집회에는 자발적으로 참여했나'라고 묻자 "그럼요! 자발적으로 (했지). 나는 돈 10원도 누구에게 지원을 받거나 한 적이 없어"라고 역설했다.

'그러면 왜 광화문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돈을 받고 동원됐다고 생각하나'라고 질문에 남 씨는 "그런 얘기를 듣고 직접 가보니까 버스가 수백 대가 와 있잖아. '차에 먹을 거 두고 왔다 가보자'라며 (버스로) 가는 노인들도 많이 봤어"라고 설명했다.

◇ "최순실, 법정 최고형으로 가야"…박 대통령에게는 "대통령도 사람이지" 관대

남 씨가 걸친 국방색 점퍼의 오른쪽 어깨 부위에는 선명한 태극기가 붙어 있었다. 그에게 '태극기는 어떤 의미냐'고 물었다.

"첫째, 국가 유공자로서 나라 사랑의 목표이지. 두번째는 월남에 참전한 해병대 출신이 불의를 보고, 지나가는 도둑놈을 보고 참을 수 없다 이거야. 국가를 위해 달고 다니는 거죠."

그에게 '박 대통령의 비선 실세 최순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망설임 없이 "아주 나쁜 X"이라는 욕설이 나왔다. 격앙된 반응이었다.

"(최순실은) 개인의 영달을 위해, 특히 (박 대통령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나라의 여자 대통령이잖아. 그 사람을 이용해서, 아주 큰 외로움을 이용해서 이런 천지를 혼란스럽게 했다는 이것은 죽일 X이야!"

남 씨에게 '최순실이 박 대통령의 비호 아래 국정 농단을 저질렀다는 증언과 정황이 나오고 있지 않나'라고 재차 묻자 "그건 나중의 문제"라는 답이 돌아왔다.

"설사 내가 대통령이라도 그렇게 (최순실을 외면)하지 않았을 거 아니오. 자, 왜 그러냐. 여동생(박근령 씨)이 못 먹고 산다며 재산 파탄 나려고 하는 상태지, 남동생(박지만 씨)과 그 아들, 그러니까 조카까지 (박 대통령이) 만나지도 않고 그랬잖아. 할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가 총 맞아 죽은 그 비참함을 아는, 대를 잇는 손자까지 만나지도 않고 그렇게까지 했는데, 그X(최순실)이 그게… 참 나쁘지."

그는 최순실에 대해 "(범죄) 사실을 밝혀서 법정 최고형으로 가야죠. 법정 최고형"이라고 역설했다. 반면 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관대함을 보였다.

"대통령도 사람이지… 대통령도 외롭게 있는 사람이잖아요. 나(박 대통령)를 40년 동안 돌본 사람(최순실)이란 말이야. 그런데 이렇게 될 줄은 (박 대통령도) 몰랐겠지. 대통령이 아직 (범죄 사실이) 밝혀진 게 하나도 없는데, 내가 그것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얘기를 할 수 있는 영역에 있지는 않은 것 같아."

그러면서도 남 씨는 "박 대통령이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받아야지"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수사 받겠다고 얘기하셨는데, 당연히 받겠지. 국민들과 약속했는데 당연히 받아야죠"라는 것이다.

끝으로 '지난 대선 때 박 대통령에게 표를 줬을 텐데, 어떤 마음이었나'라는 질문에 그는 "우리가 월남전에 참전하면서 5099명이 전사를 했어요. 20대가 대부분이었지"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이 나라가 부강해졌는데, 갑자기 부자가 되니 이런저런 문제가 생겼지. 나도 죽 먹어 봤고 술찌꺼기도 먹고 해봤어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 잘 사니까… 젊은 애들 가서 보면 전부 금수저입니다. 우리는 학교를 돈이 없어 못 나오고, 먹고 살려고 죽 먹고 살았는데, 지금 젊은층은 전쟁을 해봤나, 월남에서 전우가 죽는 걸 봤습니까."

'그러면 젊은이들이 고생한 어른들의 노고를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 박 대통령에게 표를 줬나'라고 다시 묻자, 남 씨는 "그런 걸 떠나서, 여자 대통령이 아버지가 못다한 걸 이뤄 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표를 줬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집회 참가자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광장을 향해 홀로 타박타박 발걸음을 떼는 그의 굽은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광장에 마련된 무대 위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종북" "빨갱이" "난동세력" 등 오직 편가르기에만 열중하는 듯한 무시무시한 말들이 쉴 새 없이 귀를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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