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진풍경의 역사를 논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것이 2003년 가을 전국 야구장의 외야 관중석을 가득 채웠던 잠자리채 열풍이다.
당시 삼성 라이온즈의 간판타자 이승엽은 55홈런을 때려 아시아 프로야구 한시즌 최다홈런 신기록 경신을 눈앞에 뒀다. 56호 홈런볼의 가치가 억 단위가 될 수도 있다는 소문에 이승엽과 삼성의 경기가 열릴 때마다 외야석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관중이 들어찼다. 내야보다 외야 관중석이 매진되기도 했다.
이승엽의 홈런 열풍을 상징하는 물건이 바로 잠자리채다. 야구 팬들은 56호 홈런볼을 잡기 위해 잠자리채를 들고 외야 관중석을 가득 채웠다.
잠자리채 열풍은 온갖 진풍경을 만들어냈다. 2003년 9월말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롯데의 경기가 대표적이다. 당시 롯데는 2-4로 뒤진 8회초 1사 2루에서 이승엽을 고의볼넷으로 내보냈다. 마지막까지 승부를 포기할 수 없어 내놓은 작전이었다.
그러자 외야 관중석의 팬들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다수가 롯데 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동이 크게 일어났다. 그라운드를 향해 오물이 투척됐고 쓰레기통이 날아오기도 했다. 결국 김용철 당시 롯데 감독대행이 다음날 직접 나서 팬들에게 사과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승엽은 롯데를 상대로 대망의 신기록을 세웠다. 2003년 10월2일 대구 삼성전에서 롯데 이정민을 상대로 시즌 56호 홈런을 쏘아올렸다. 이정민은 정정당당하게 이승엽과 승부했고 이승엽은 대구 홈 팬들 앞에서 아시아 기록을 갈아치웠다.
8일 오후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롯데와 삼성의 2017 타이어뱅크 KBO 리그 정규리그 최종전.
사직에서 특별한 추억이 많은 이승엽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경기에 앞서 은퇴투어 행사가 시작됐다. 롯데의 주장 이대호가 나와 잠자리채를 이승엽에게 건넸다. 이승엽은 웃음을 참지 못했고 이대호와 함께 박장대소했다.
이어 이윤원 롯데 단장이 그라운드에 나와 이승엽에게 10돈짜리 순금 잠자리채 모형을 선물했다. 롯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이디어가 좋았다.
이승엽의 경북고 후배 박세웅은 롯데 선수들의 사인이 담긴 배트를 선물했고 조원우 롯데 감독은 이승엽에게 꽃다발을 전달했다. 이승엽은 롯데 선수들과 단체로 사진 촬영을 하며 우정을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