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시의 역설' KIA는 챔피언이 아니라 도전자다

'시즌 전을 돌아보라' 올 시즌 전 프로야구는 KIA가 상위권에서 잘 하면 1강 두산을 괴롭힐 것으로 전망됐다. KIA가 예상을 깨고 시즌 내내 1위를 달렸지만 막판 두산에 추격을 허용해 정규리그 우승에 노란 불이 커졌다. 사진은 시즌 개막 미디어데이에서 KIA 김주찬(앞 왼쪽부터), 김기태 감독, 양현종이 팬들에게 인사하는 모습.(자료사진=이한형 기자)
온통 KIA의 위기설이다. 후반기 거침없이 밀고 올라오는 두산에 한국시리즈(KS) 직행 티켓을 내줄지 모른다는 전망이 쏟아진다.

그도 그럴 만하다. KIA는 지난주 '2017 타이어뱅크 KBO 리그' 5경기에서 1승4패에 허덕였다. 그 사이 두산은 4경기 전승을 일궈내며 KIA와 승차를 없애고 마침내 공동 1위로 올라섰다. 82승55패로 승패는 같지만 두산이 3무로 KIA보다 2경기를 더 비겼다.

KIA는 지난주 팀 평균자책점(ERA)은 4.60으로 10개 구단 중 5위로 중간은 했지만 팀 타율은 2할5푼으로 9위, 최하위권이었다. 반면 두산은 주간 ERA 1위(2.00)의 마운드를 앞세웠고, 타율도 2할9푼 3할에 가까운 6위였다.

두산이 1위에 오른 것은 시즌 개막전 승리 이후 처음이다. 지난 4월 12일 1위로 올라선 KIA가 공동 선두를 허용한 것은 NC와 4일 동안 1위를 나눴던 6월 28일 이후 거의 세 달 만이다.

KIA는 전반기를 2위 NC에 8경기 차로 앞선 1위로 마쳤다. 당시 두산은 KIA에 13경기 차 5위에 불과했다. KIA의 정규리그 우승은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러나 두산이 후반기 40승16패2무, 승률 7할 이상의 엄청난 성적으로 추격했고, 25승1무27패로 주춤한 KIA를 마침내 따라붙은 것이다.

전반기 승차와 후반기 두산의 진격을 감안하면 KIA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듯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거의 시즌 내내 1위를 달린 KIA가 KS에 직행하지 못한다면 올 시즌은 실패처럼 여기지는 분위기다. KIA가 엄청난 부담감에 쫓기는 양상이라는 것이다.

'진격의 곰 군단' 두산은 후반기 승률 7할1푼4리의 엄청난 기세로 전반기 1위 KIA와 13경기 차를 극복하고 공동 선두로 올라섰다.(자료사진=두산)
하지만 어쩌면 정말 쫓겨야 하는 팀은 KIA가 아니라 두산이 아닐까.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 못한다면 정말 아쉬운 팀은 사실 두산이어야 하지 않을까. 시즌 전 예상과 팀 전력, 최근 몇 년 동안의 성과 등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치다.

시계를 6개월 전으로 돌려보자. 올 시즌 우승후보 0순위는 두산이었다. 최근 KS 2연패를 이룬 전력이 고스란히 남았기 때문이었다. 2015년 KS 우승이야 '해외 도박 파문'의 직격탄을 맞은 삼성의 덕을 듬뿍 받은 행운(?)이 따랐다고 쳐도 지난해 두산은 그야말로 투타, 공수주에서 최강을 자랑하며 통합 우승을 일궈냈다. 지난해에서 빠진 전력이 없던 두산은 자타가 공인한 최강팀으로 꼽혔다.

물론 KIA도 우승후보로 꼽히긴 했다. KBO 리그 첫 '100억 원의 사나이' 최형우를 삼성에서 데려오고, 에이스 양현종을 앉히는 등 겨우내 알차게 전력을 가다듬은 까닭이었다. 지난해 후반기 군 제대한 김선빈, 안치홍 키스톤 콤비의 본격적인 활약도 기대감을 갖게 했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 KIA는 상위권 전력으로 분류됐던 게 사실이다. 전력의 주축들이 호흡을 맞춘 시간이 너무 짧았던 데다 불펜에서 확실한 약세가 예상됐기 때문이다. 사실 KIA는 2009년 우승 뒤 중하위권을 맴돈 팀이었다. 2011년 4위로 가을야구에 턱걸이했지만 2015년까지 7, 8위에 머물렀다. 와일드카드 제도가 없었다면 지난해도 쓸쓸한 가을이었다.

때문에 구단 내부에서는 올해 목표를 우승에 두진 않았다. KIA 관계자는 "타선이 강화됐다고는 해도 불펜의 약점이 있기 때문에 3위 정도면 만족할 만한 시즌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고 귀띔했다. 전문가들의 예상도 두산을 1강으로, KIA는 상위권 혹은 두산의 대항마 정도로 꼽혔다.

'이때만 해도 공공의 적은?' 2017 타이어뱅크 KBO 리그 미디어데이 당시 우승후보 1순위는 두산이었다.(자료사진=이한형 기자)
하지만 2017시즌 KBO 리그에는 거대한 '착시 현상'이 일어났다. 시즌 전후 예상 밖의 변수들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KIA 구단 내부의 변화와 KBO 리그의 제도, 국제대회 등의 외적인 변수였다. 시즌이 진행되면서 이 변수들은 복합적으로 맞물렸다.

먼저 시즌 전 KBO 리그는 안팎으로 예년과 다른 시즌을 맞았다. 선수들의 비활동 기간이 늘어나 스프링캠프가 보름 정도 늦춰진 것. 지난해까지 1월 중순 시작됐던 스프링캠프를 2월 이후로 늦추면서 그만큼 선수들의 훈련량이 줄었다.


여기에 밖으로는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있었다. KBO 리그의 주축 선수들은 2월 대표팀에 차출됐다. 물론 대표팀도 훈련을 소화하지만 소속팀의 스프링캠프와는 다른 성격이었다.

공교롭게도 주전이 8명이나 차출된 두산은 이들이 복귀한 후에도 제 컨디션을 찾지 못해 전반기 애를 먹었다. 지난해 KS까지 치른 두산은 훈련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한 두산 선수는 "사실 우리 팀은 훈련을 많이 해야 하는 선수들이 적잖은데 가뜩이나 늦어진 스프링캠프와 WBC로 훈련량이 적어 힘들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전반기 두산이 5위에 머문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국제대회 차출 문제는 불가피한 측면이다. 여기에 늦은 스프링캠프는 10개 구단 모두에 해당되는 부분이었다. 이런 점에서 두산은 달라진 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의미도 된다. 마이클 보우덴 등 주축들의 부상도 있었지만 전반기 부진의 큰 이유였다.

2017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이스라엘과 개막전에 출전한 두산 내야수 오재원.(자료사진=황진환 기자)
반대로 KIA는 달라진 안팎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한 셈이다. 에이스 양현종이 지난해 200이닝을 소화하고 WBC까지 치렀음에도 승승장구하며 헥터 노에시와 강력한 원투펀치를 이뤘고, 최형우도 몸값을 톡톡히 해내며 리그 최고 타자의 위력을 떨쳤다.

무엇보다 KIA는 발빠른 움직임으로 시즌 중 약점을 멋지게 메웠다. 4월 7일 시즌 초반 SK와 4-4 대형 트레이드를 단행한 KIA는 주전 안방마님 김민식과 수준급 1번 타자 이명기를 얻었다. 2015년 FA(자유계약선수) 송은범(한화)의 보상 선수로 얻은 임기영의 전반기 7승2패 깜짝 활약은 KIA 프런트의 장기적인 안목까지 빛나게 한 대목이었다.

김기태 감독의 맏형같은 '믿음 리더십' 속에 KIA는 새로운 팀이 무색할 만큼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냈다. 초반 부진했던 로저 버나디나는 숨겨진 장타력을 과시, 3번 중심 타자로 거듭나며 KIA 핵타선 구축에 앞장섰다.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마치 KIA가 챔피언이었고, 두산이 도전자인 것 같은 인식이 리그에 자리잡게 됐다. KIA가 전반기 강력한 선두 질주를 펼치고 두산이 힘겨운 행보를 이으면서 두 팀의 입지가 완전히 뒤바뀌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KIA가 너무 잘해서 그동안 우승팀이었던 것처럼 보인 것이었다.

올해 KIA 관련 기사에는 마치 정규리그 우승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팬들의 댓글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전반기 엄청난 질주를 펼쳤기 때문에 일견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자의반 타의반의 착시 현상, 혹은 거품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현실과 거리가 있는 인식이었다.

KIA의 전반기 1위 질주의 배경에는 엄밀히 따져 두산의 부진이 적잖게 작용했다. NC가 6월 말 KIA를 따라잡기는 했지만 리그에서 KIA를 견제할 팀이 전반기에는 없었다. 두산이 지난해만큼만 컨디션을 전반기에 보였다면 KIA의 올해 독주는 불가능했을 것이었다. KIA의 1위 질주에는 WBC라는 행운(?)의 요인도 분명히 작용했다.

'복덩이들' 올해 SK에서 이적해온 외야수 이명기(왼쪽)-포수 김민식은 KIA의 올 시즌 돌풍의 중심에 섰다.(자료사진=KIA)
물론 KIA의 전반기는 성난 호랑이였다. 하지만 사실 전반기 57승28패(승률 .671)를 거둘 만큼의 전력 밸런스는 아니었다. 팀 타율과 선발진은 리그 톱을 달렸지만 불펜 ERA는 6.22로 최하위였다. 워낙 방망이가 뜨겁고 선발이 잘 막아줘 전반기에는 묻혔던 약점이었다.

하지만 후반기 불안했던 뇌관이 결국 터지고 만 것이다. 흔들린 선발진과 침잠한 타선도 더 이상 불펜 방화를 막아줄 수 없었다. KIA가 후반기 5할 승률을 밑도는 데는 주전과 비주전의 적잖은 기량 차이도 있다. 주전이 부진할 때 메워줄 백업이 KIA에는 부족하다. 최주환, 류지혁, 박세혁, 서예일 등 주전급 백업이 즐비한 두산이 후반기 맹위를 떨치는 모습과 상반된다.

지금까지 KIA는 정말 시즌을 잘 치러왔다. 2009년 우승 뒤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꾸준히 선수를 모아 전력을 만들었고, 시즌 중에도 민활한 움직임으로 약점을 보완시켰다. 이런 점만으로도 올해 KIA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다만 시즌의 마무리는 중요하다. 물론 외적인 요인이 있었다고는 하나 적잖은 약점에도 이처럼 환상적으로 1위를 달렸는데 막판 무산되면 상실감과 허탈감은 클 수밖에 없다. 이는 다가올 가을야구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현재 KIA는 '착시의 환상'에서 벗어나는 게 먼저다. KIA는 챔피언이 아니었고, 분명히 도전자다. 디펜딩 챔피언은 KS 3연패를 노리는 두산이다. 정규리그 우승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부담에 쫓겨야 할 팀은 KIA가 아니라 오히려 두산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최근 분위기는 마치 KIA가 수년 동안 리그를 지배해온 팀이었는데 강력한 도전자를 만나 우승을 차지 못할 위기에 놓인 것 같은 모양새다.

두산도 절박하기는 마찬가지다. 올해 두산이 KS 3연패를 이루지 못한다면 성공이라고 보기에는 적잖게 아쉬운 시즌이다. 지난해 KS 상대 NC가 괴물 에릭 테임즈를 잃은 상황이다. KIA가 거침없이 내달리긴 했지만 이는 두산이 어쨌든 전반기 부진한 탓이 컸다. 후반기 챔피언의 위용을 되찾은 데 만족해선 안 되는 두산이다. 2위가 된다면 롯데 등 만만치 않은 적들과 플레이오프(PO)를 치러야 하기에 KS 직행은 포기할 수 없다.

KIA 김기태 감독은 이른바 동행 리더십으로 올 시즌 팀의 결속을 다지며 1위 질주를 이끌어왔다. 그러나 트레이드 강수에도 불펜 불안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다. 사진은 김 감독이 지난 12일 SK와 원정에서 승리한 뒤 마무리 김세현을 격려하는 모습.(자료사진=KIA)
그런 점에서 KIA는 오히려 잃을 게 적다. 시즌 전 전력과 최근의 성적 등을 포함해 KIA는 두산에 뒤지는 입장이었다. 올해 1위 질주는 KIA의 노력과 함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처럼 예상 밖의 변수가 작용한 일종의 행운도 따른 것이었다.

이것을 마치 KIA가 리그를 지배했던 팀인 것마냥 착시 현상이 일어난 것은 어쩌면 KIA에는 독이 될 수 있다. 엄청난 부담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반대로 두산으로서는 고마운 현상이었다. 애초 자신들이 짊어졌어야 할 굴레를 KIA가 대신 지고 갔기 때문이다.

당초 리그를 호령했던 챔피언은 두산이었고, KIA는 지난해 간신히 가을야구에 올라 올해 더 나은 성적을 노리는 도전자다. 이게 원래 '착시 현상' 이전의 올해 KBO 리그의 명제였을 터.

올 시즌 개막 미디어데이에서 김태형 두산 감독은 "내년에도 이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하겠다"며 KS 3연패를 다짐했다. 김기태 감독은 "2017년 더 높은 곳을 바라보기 위해, 꼭 홈에서 멋진 포스트시즌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많이 했다"면서 "좋은 모습을 약속한다"고 출사표를 던졌다. 누가 챔피언이고, 도전자인지는 분명하다.

만약 KIA가 '착시의 늪'에서 벗어나 애초 홀가분했던 도전자의 자세로 돌아간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챔피언이 아닌 KIA에 위기설 자체가 어쩌면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KIA는 두산보다 2경기를 더 남겨놔 산술적으로 유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마다하고 챔피언의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두산의 우승 가능성은 그만큼 더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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