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 그 두꺼운 안경에 야망이 번뜩이더라

'이거야' 정현은 12일(한국 시각)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넥스트 제너레이션 파이널스 초대 챔피언에 등극하며 테니스 차세대의 선두 주자로 떠올랐다. 사진은 경기 중 정현이 포인트를 따내고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밀라노=대한테니스협회)
생애 첫 우승은 많은 것을 느끼고 변하게 만드나 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세계에서 통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한국 테니스의 희망' 정현(21 · 삼성증권 후원)이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장착했다. 자신감이다.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첫 우승으로 자신의 선수 생활에 날개를 달았다. 또래 실력자 중 최고의 유망주라는 점을 인정받았다.

정현은 12일(한국 시각)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끝난 ATP 넥스트 제너레이션 파이널스에서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21세 이하 선수 중 세계 랭킹 상위 8명을 모두 겨룬 대회에서 정현은 5전 전승으로 정상에 올랐다.

올해 신설된 넥스트 제너레이션 파이널스는 랭킹 포인트는 없지만 엄연한 ATP 투어 대회다. 홈페이지에도 정현의 소개란에 '투어 대회 우승 1회'가 표기돼 있다. 한국 선수로는 '전설' 이형택(41)의 2003년 1월 아디다스 인터내셔널 이후 14년여 만의 투어 우승이다. 당시 28살이던 이형택을 넘어 역대 한국 선수 최연소 우승 타이틀도 얻었다.

금의환향한 정현의 얼굴에는 뿌듯함과 자신감이 넘쳤다. 13일 인천공항 입국장에서 취재진과 만난 정현은 "윔블던 주니어 단식 준우승(2013년) 이후 이렇게 많은 취재진과 팬들이 모인 것은 처음"이라면서 "이제야 우승한 게 실감이 난다"고 들뜬 표정을 지었다. 이어 "그때보다 더 많은 분들이 오셨다"며 웃었다.

이형택 이후 14년 10개월 만에 ATP(남자프로테니스) 투어 정상에 오른 한국 남자 테니스의 간판 정현(21·세계랭킹 54위)이 13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해 환영을 받고 있다. 황진환기자
유망주들만 나선 대회였지만 어느 대회 못지 않게 경쟁이 치열했다. 향후 세계 테니스계를 주름 잡을 기대주들이 총출동한 대회였다. 정현은 당시 랭킹이 54위로 8명 중 5번째에 불과했고, 37위 안드레이 루블레프(러시아), 48위 보르나 초리치(크로아티아) 등이 나섰다. 결승에서 루블레프는 정현에 밀리자 라켓을 내던지는 등 투지를 끌어올리려 애를 쓰기도 했다.

정현은 "밀라노에 가기 위해 1년 동안 열심히 했고, 힘든 것을 참아내며 경기를 했다"면서 "모든 선수들이 그 순간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다"고 올 시즌을 돌아봤다. 이어 "대회를 하는 일주일 내내 정말 좋았고, 노력한 게 이뤄진 날이 와서 기뻤다"면서 "21살 이하 선수들이 나왔지만 투어 우승 경험을 비롯해 경쟁력 있는 선수들이 있었는데 많은 걸 경험하고 느꼈다"고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 우승 외에도 올해는 정현에게 수확이 많았다. 5월 BMW오픈에서 생애 첫 투어 4강에 진출했고, 개인 최고 랭킹인 44위까지 올랐다. 프랑스오픈에서는 메이저 대회 개인 최고 성적인 32강까지 나섰다.


다비드 고핀(벨기에)과 로베르토 바우티스타 아굿(스페인) 등 당시 랭킹 13위를 꺾는 기염도 토했다. 1위 라파엘 나달(스페인)에 2패를 안았지만 칭찬을 들었고, 프랑스오픈에서는 당시 9위던 니시코리 게이(일본)에는 승리를 앞뒀지만 우천으로 연기된 경기에서 2-3으로 지기도 했다.

'혼신의 백핸드' 정현이 ATP 투어 넥스트 제네레이션 파이널스에서 주무기인 강력한 백핸드 스트로크를 펼치는 모습.(밀라노=대한테니스협회)
이런 경험이 자신감으로 쌓였다. 정현은 인터뷰에서 특유의 겸손한 태도로 강한 멘트를 원하는 취재진을 감질이 나게 만들었지만 군데군데 자연스럽게 패기가 묻어나는 발언도 잊지 않았다.

이번 우승으로 '테니스의 김연아, 박태환'이라는 얘기가 나온다는 말에 정현은 "그런 대단한 선수들과 비교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자세를 낮추면서도 "몇 년 뒤에는 테니스도 피겨 스케이팅이나 수영처럼 인기 종목으로 올라설 수 있도록 모든 선수들이 노력하기 때문에 꿋꿋이 하다 보면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힘이 실린 전망을 내놨다.

대선배 이형택의 한국 남자 선수 최고 랭킹인 36위 경신에 대한 자신감도 드러냈다. 정현은 "내년에 (그 기록을) 깰 수 있다고 장담을 하진 못한다"면서도 "하지만 언젠가는 깰 수 있지 않을까, 거의 가까이 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세계 무대를 위한 코칭스태프 변화에 대해서도 정현은 "지금 코치진으로도 충분하지만 더 높은 위치에 서면 자연스럽게 바뀔 것"이라면서 "그때가 올 거라고 생각한다"고 확신했다.

물론 세계 톱클래스에 서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부단한 노력과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본인도 절감하고 있다. 정현은 "더 훌륭한 선수가 되려면 모든 면에서 발전해야 한다"고 일반론을 제시하면서 "(약점인) 서브가 예리해져야 하고, 정신과 체력적으로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고 느낀다"고 냉철한 자기 반성을 들려줬다. 이어 "기술적으로 좋아지고 싶으면 당연히 훈련을 해야 한다"면서 "동계 기간 웨이트도 매일 하고, 밸런스를 위한 필라테스나 마사지 등 유연성 강화 훈련을 할 것"이라고 구체론도 언급했다.

무엇보다 투어를 온전히 마칠 수 있는 몸을 만들어야 한다. 정현은 "올해는 부상으로 몇 개월을 투어에 나서지 못해 아쉬울 뿐"이라면서 "그런 점에서 올 시즌 내 점수는 80점"이라고 다소 박하게 평가했다. 이어 "내년 다른 선수들처럼 부상 없이 마무리하면 100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형택 이후 14년 10개월 만에 ATP(남자프로테니스) 투어 정상에 오른 한국 남자 테니스의 간판 정현(21·세계랭킹 54위)이 13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 트로피에 입을 맞추고 있다. 황진환기자
이런 강력한 동기 부여가 이뤄진 것은 역시 '우승의 맛'을 알았기 때문이다. 정현은 "대회를 하는 동안 ATP 관계자들이 선수들을 잘 대우하더라"면서 "이래서 선수들이 높은 곳에 서고 싶다고 하는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오늘 공항에 도착해서 지금껏 가장 큰 환대를 받았다"면서 "선수들이 왜 우승을 하고 싶어하는지를 알게 됐다"고 빙긋 웃었다. 인터뷰 이후 정현은 한동안 이어진 팬들의 사진 촬영과 사인 요청에 친절하게 응했다.

이제 정현은 '빅 픽처'를 설계하고 있다. 메이저 대회다. 일단 이형택이 2000년과 2007년 US오픈에서 거둔 한국 선수 최고 성적인 16강이다. 이어 우승까지도 바라보고 있다.

정현은 "(메이저 우승이라는) 큰 그림은 아직 못 그렸다"면서도 "이제 조금씩 조금씩 그려나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교수'라는 별명의 상징인 두꺼운 안경 너머로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정현의 눈빛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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