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B컷]22년 전 현장에 남은 DNA…골프장 강간살인범 붙잡다

99년 7월 차량 착각한 피해자 골프장으로 끌고 가 성폭행
의식 못 차리고 숨져…범인 잡히지 않아 '미제사건'으로
2016년 DNA로 실마리 찾아…알고보니 연쇄 강도살인범
17년 만 재수사…DNA에도 "형이 범인" 책임 떠넘기기도
2020년 11월 檢, 강간살인으로 기소…사건 발생 21년 만

※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 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편집자 주]

황진환 기자
2021.3.15 '서울중앙지법 성폭력처벌법 강간등살인' A씨 공판
재판장 "다음 사건 A 피고인 나오세요. 자 우리 재판부 판사가 바뀌어서 공판절차를 갱신합니다. 피고인은 재판받는 동안 진술하지 않거나 각 답변을 거부할 수 있고 이익되는 사실을 진술할 수 있습니다. 주소나 기타 인적 사항 바뀐 거 있습니까?

A씨 "없습니다"

재 "검사님 공소사실 요지 말씀해주시죠"

검사 "이 사건 공소사실은 피고인이 1999년 7월 성명불상자와 함께 흰색 자동차를 운전하던 중 당시 20살이었던 피해자가 A씨의 승용차를 잘못 알고 탑승했고 하차를 요구했지만 A씨는 성폭행하기로 마음먹고 하차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15일 서울중앙지법 소법정. 피고인의 이름이 불리자 법정 안 대기실에서 푸른색 수의 차림의 중년 남성 A(51)씨가 걸어 나옵니다. 백발에 안경을 낀 채 조용히 고개만 숙이고 있던 A씨. 그가 받는 혐의는 피해자를 성폭행하고 살인했다는 '강간 등 살인' 혐의입니다.

죄명 자체로도 끔찍하지만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가 재판 받는 사건이 무려 22년 전인 1999년에 발생했다는 점입니다. '20년도 더 된 사건인데 왜 이제야 1심 재판이 진행 중인 걸까?' 그 이유를 취재해봤습니다.

◇골프 연습장서 발견된 피해자, 사라진 범인

사건은 22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1999년 7월 6일 새벽 1시 무렵 목격자의 신고로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골프 연습장에서 당시 20살이었던 피해자가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됩니다. 머리를 포함한 온 몸은 상처투성이였고 하의가 벗겨져 있는 등 성폭행을 당한 흔적이 명확했습니다.

이 지역을 담당했던 서울 강남경찰서는 바로 수사에 나섰고 유일한 목격자인 골프장 연습장 직원으로부터 몇 가지 단서를 포착합니다. 범인은 흰색 자동차를 타고 왔고 범행 후 이 차를 타고 떠날 때 조수석에 사람이 있던 것으로 보아 일당은 최소 두 명 이상으로 추측된다는 것.

이를 기초로 수사한 결과, 피해자는 밤늦게 차를 기다리고 있다가 외관이 똑같은 흰색 차에 실수로 탔고 이 차의 운전자와 같이 탄 일행들이 피해자를 인적이 드문 골프 연습장으로 끌고 가 이러한 범행을 저지르고 현장을 곧바로 떠났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하지만 이 범행을 누가 저질렀는지 규명하는 데는 끝내 실패합니다. 유일한 목격자는 당시 겁에 질려 차 안에 숨어있던 터라 범인의 얼굴은 물론, 인상착의도 제대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당시는 CCTV조차 보편적으로 설치돼있지 않던 때라 범인의 동선 또한,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유일하게 상황을 기억할 피해자는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건 발생 나흘 만인 10일 숨졌습니다. 이후 결국 범인을 특정할 다른 단서를 찾지 못했고 이 사건은 '미제 사건'으로 분류돼 서울지방경찰청 캐비넷에 들어갑니다. 이때만 해도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그놈'은 영영 잡히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DNA는 남았다…범인은 연쇄 강도살인범

스마트이미지 제공
하지만 그로부터 17년의 시간이 흘러서 사건을 풀 실마리가 발견됩니다. 바로 그 어떤 진술이나 기록보다 명확한 증거인 'DNA' 였습니다. 골프장 사건의 피해자 신체에서 채취한 범인의 DNA가 당시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었던 A씨의 것과 일치하는 결과가 2016년 12월 나오게 된 겁니다.

이는 2010년 'DNA법'으로 불리는 DNA 신원확인정보의이용및보호에관한법률 시행 덕이 컸습니다. 법 시행 후 강력범죄 사건 같은 경우 검찰은 교도소에 복역하는 수형자의, 경찰은 미제사건의 DNA 정보를 각각 데이터베이스화하며 정기적으로 서로 일치하는 DNA가 있는지 교차 분석하는 시스템을 마련했습니다.

2003.1 수원지법 '강도살인' 혐의 A씨 1심 판결 中

미리 준비한 청테이프로 손과 발을 묶어 항거불능케 하고 피해자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그 안에 있던 현금 10만 원, 신용카드를 빼앗아 이를 강제로 취했다. 계속하여 피해자에게 "비밀번호를 말하라"고 요구하며 무릎으로 피해자의 가슴과 목 부위를 누른 상태에서 주먹으로 배 부위를 수회 때리기도 했다. (중략) 피해자로부터 신용카드 비밀번호를 알아내려 했지만 실패한 후 수사기관에 대한 신고를 지연하기 위해 청테이프로 피해자의 손과 발 외에 입과 눈을 막고 몸통을 묶어 피해자는 그 무렵 현장에서 경부압박으로 인한 질식으로 사망하여 피해자를 살해했다


A씨는 당시 별도로 저지른 강도살인 혐의로 2003년 수원지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형이 그대로 확정되며 복역 중이었는데요. 수법도 놀랄 만큼 1999년 사건과 유사했습니다.

2001년 8월부터 2002년 6월까지 서울 강남 일대를 차로 돌아다니며 택시나 차를 기다리는 행인들을 태워 돈을 뺏고 끔찍하게 폭행하는 일을 일삼아왔던 겁니다. 이렇게 금원을 갈취한 피해자만 10명을 넘고 이중 2명은 사망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말 그대로 '묻지마 강도살인'을 반복적으로 저지르고 다녔던 셈으로 이러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넘어오며 본격 재기 수사가 이뤄졌고 서울경찰청 주요미제사건수사팀은 2017년 초 A씨를 정식 피의자로 입건했습니다.

◇"형이 주범" 책임 떠넘기던 피의자…알리바이에 무너져

스마트이미지 제공
명확한 증거에도 A씨는 좀처럼 범행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아닌 사건이 발생하고 얼마 후 숨진 자신의 형이 범행을 주도한 것이라고 말하거나 "강제로 성폭행한 것은 아니"라는 식의 뻔뻔한 태도까지 보였다는 게 당시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의 말입니다.

이에 경찰은 그 당시 목격자와 주변인들을 한 명 한 명 다시 불러 진술을 듣고 범행 당시 촬영된 사진들까지 면밀히 검토했습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A씨가 책임을 돌렸던 그의 형은 정작 범행이 일어난 시점에 서울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게 됩니다. 이미 죽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형에게 주된 책임을 떠넘기려 한 것으로 경찰은 봤습니다.

이후 최종적으로 이 사건의 주범이 A씨인 것으로 결론 내리고 그해 7월 검찰에 사건을 넘겼고 서울중앙지검은 3년에 걸쳐 증거들에 대한 감정을 진행하며 보완 수사한 끝에 2020년 11월 A씨를 성폭력처벌법상 강간등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겼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지 21년하고도 4개월, 일수로는 약 7900일 만입니다.

현장에 남은 DNA로 십수년 전 범행이 발각된 것도 드라마틱하지만 극적인 요소는 또 있습니다. 사실 이 사건은 1999년 발생 당시만 해도 공소시효가 15년으로 원래대로라면 2014년에 만료될 위기에 놓였었습니다.

하지만 2010년 성폭력 범죄에 대하여서 유전자 등 그 죄를 증명할 과학적인 증거가 있는 때에는 공소시효가 10년 연장된다는 규정이 신설되며 기존 제도대로라면 시효가 만료됐을 시점에 A씨를 법정에 세우는 것이 가능케 된 것이죠.

2021.3.15 '서울중앙지법 성폭력처벌법 강간등살인' A씨 공판
재판장 "변호인이 동의한다고 한 서면 증거에 관해서 증거조사를 한 상태고 부동의한 부분에 대해서는 관련자들에 대해 증인신문을 하기로 검사님 입증 계획서를 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검찰에서 신청한 증인 3분을 신문하기로 한 날입니다. 3분 모두 출석하셨나요. 출석하셨고…피해자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증인신문은 비공개로 하려고 하는데 특별한 의견 있으십니까?

검사·변호인 "동의합니다"

재판장 "관련 사건 핵심 부분과는 상관이 없다고 해도 노출될 염려가 있기 때문에 특별한 의견이 없으면 증인신문은 비공개로 하겠습니다"


다시 재판으로 돌아와보겠습니다. 이날 재판은 성범죄 사건 특성상 피해자의 사생활 노출 우려를 이유로 A씨의 혐의 요지 설명 이후 대부분 비공개로 전환됐습니다. 이날은 수사 과정에서 조사를 받았던 주변인들의 증인신문이 있던 날입니다.

정확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A씨 측에서 증거들을 인정하지 않으며 증인신문이 이뤄진 점을 고려할 때 A씨는 여전히 혐의 상당 부분을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A씨는 검찰에 넘겨져서도 경찰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폭행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죄가 확정되지 않은 '피고인' 신분이니 원칙적으로는 어떤 주장도 할 수야 있지만 드러난 증거와 그가 인정한 사실관계에 비춰봐도 먼저 보였어야 할 태도는 꽃다운 나이에 잔혹한 범행에 숨진 피해자에 대한 반성과 뉘우침 아니었을까요?

영영 알 수 없을 것 같던 사건의 진상. 공소시효의 우여곡절을 거쳐 17년의 시간 만에 'DNA'로 사건을 풀 실마리가 나왔고 4년에 걸친 경찰과 검찰의 수사 끝에 이제 법적 판단 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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