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B컷]'사법농단'이라더니 중형 아닌 집행유예…왜?

"재판개입은 중범죄" 꾸짖었지만 형량은 '애매'
1심 유죄 논리 두고 갑론을박 치열

※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 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편집자 주]

2021.3.23 서울중앙지법 사법농단 첫 유죄 선고
"피고인 이민걸은 (임종헌의) 부당한 동기나 목적을 알고 있었음에도 법원 내 연구회 중복가입 해소 조치와 관련해 별다른 의견을 밝히지 않았고, 그 시행을 멈출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에는 동의한다는 의견을 밝혀 결국 끝까지 주무 실장으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후배 판사에게 특정 사건 재판부의 심증을 확인해 보고하라는 위법·부당한 지시를 해 그 판사가 법에서 정한 범위를 벗어난 일을 하게 됐습니다.…이민걸의 각 범행의 중대성에 상응하는 형벌이 부과될 필요가 있습니다."

2016년 말 '국정농단'에 뒤이어 등장한 '사법농단'이라는 표현은 우리 국민 모두에게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인권과 정의, 법치주의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로 믿어왔던 사법부조차 권력에 취약했고 '불가침의 영역'이라고 믿어왔던 재판은 조작에 노출돼 있다는 것을 드러냈기 때문이죠.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구속기소 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종민 기자
늘 심판자의 위치에만 있었던 사법부는 사상 처음으로 대대적인 검찰 수사를 받았고, 대법원장이 구속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렇게 본격 재판이 진행된 지 2년여 만에 나온 첫 유죄의 무게는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 받은 형량입니다.

1심 재판부는 재판개입 행위에 대해 '중대한 범행'이라고 비판했지만, 일반적으로 봤을 때 '중형'이라고 할 만한 형을 선고하진 못했습니다. 함께 유죄가 선고된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역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에 그쳤습니다. (이하에서는 독자의 편의를 위해 어려운 직함을 생략하고 피고인의 이름만 기재하겠습니다.)

사법농단 사건의 유죄를 주장하는 쪽도, 무죄를 지지하는 쪽도 판결을 두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습니다. "재판개입이라는 중대한 혐의에 대해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 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거나 "유죄를 택하긴 했지만 재판부가 논리적으로 자신이 없어 어정쩡한 결론을 택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왼쪽)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연합뉴스
특히 재판부는 "이규진의 각 범행은 어느 것 하나 뺄 수 없이 중대한 것이나, 그 스스로도 판사이면서 구체화된 재판권의 행사를 두 번이나 현실적으로 방해한 것은 특히 중대하다"고 꾸짖기까지 했습니다.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법정형은 5년 이하의 징역형 등인데, 이들이 행한 재판개입 행위가 여럿이다 보니 상한이 7년 6개월까지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 형량은 음주운전 재범이나 1억 원 미만의 사기 범행을 저지른 범죄자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던 겁니다.

2021.3.23 서울중앙지법 사법농단 첫 유죄 선고
"이민걸·이규진이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고, 범행을 주도하고 지시한 사람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윗선이었습니다. 이 사건 수사와 재판에서 피고인들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떠올려 진술하려고 했고, 재판에도 성실히 임했습니다. 또 30년 가까이 판사로 근무하면서 재판사무를 수행한 점은 유리한 정상입니다."

재판부는 이들에 대한 '유리한 양형사유'에 나름의 고심을 담았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이익'에 금전적인 것뿐 아니라 향후 더 높은 보직에 오르기 위한 마음도 포함된다고 본다면, 이들의 행위가 사리사욕의 차원은 아니라고 단정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이들이 일반 회사원이 아닌 적법과 불법의 경계를 늘 고민하는 법관이라는 점에서 윗선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는 게 넉넉한 핑계가 될 수도 없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판사의 재판개입 행위를 현행 형사절차로 '충분히' 단죄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구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앞서 사법농단 사태로 기소된 6명의 판사에게 줄줄이 무죄가 나올 때부터 비판이 일던 부분입니다.

현재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심판을 받고 있는 임성근 전 부장판사의 형사 1심 재판부는 '재판에 개입할 권한'이라는 직권은 재판 독립의 원칙에 위배돼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직권남용죄도 성립할 수 없다며 부득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임성근 전 부장판사. 연합뉴스
다만 이민걸·이규진 1심 재판부는 '재판에 개입할 권한'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해 유죄를 끌어냈습니다. 그 근거를 요약정리 방식으로 짚어보겠습니다.

2021.3.23 서울중앙지법 사법농단 첫 유죄 선고 취지 요약
*'재판 독립'은 절대적인 원칙이 아님. 국민의 재판청구권 보장 원칙이나 재판은 헌법과 법률에 기속돼야 한다는 원칙과 충돌할 때 다소 제약될 수도 있음.(예를 들어 나태하거나 업무에 미숙한 판사가 명백한 실수를 계속하는 경우, 항소심·상고심을 거친다고 해서 바로잡기 어려우므로 적절한 지적이 필요할 수 있음.→이번 판결에서는 이를 '지적 사무'라고 칭함.)

*실제로 재판 독립과는 충돌하는 다른 헌법상의 원칙을 보장하기 위해 법관의 임기를 10년으로 제한하는 한편 대법원장이 인사권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음. 장기미제사건 처리 등 특수한 경우에 한해 사법행정권자의 일정한 '개입'도 인정하고 있음. 이처럼 이미 재판 독립과 충돌하는 여러 장치들이 있는데 '지적 사무'만 인정하지 않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짐.

*다만, 단순히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는 수준을 넘어 어떤 방향으로 처리할 것을 '권고'해서는 안됨.

*직권의 범위를 협소하게 해석해 직권을 마음대로(재량적) 남용하는 것뿐 아니라 직권 범위를 다소 넘어서서 월권을 행사하는 식으로 남용하는 것 역시 직권남용에 해당함.(다만 월권의 범위는 직권에 속하는 사항과 상당히 관련된 범위로 제한됨.)

'법관의 완전무결성'에 대한 환상을 깬 것은 물론이고, 처벌공백이 크다는 비판을 받아온 현행 직권남용죄를 보다 폭넓게 해석했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에 박수를 보내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재판 개입 자체를 절대 금기로 보고 대법원장을 구속기소했는데, 대법원장의 재판 지적 사무 자체는 가능하다고 하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며 모순을 지적했습니다. 직권남용죄 공백을 해소하려면, 국회가 '월권죄'를 입법해야지 판사가 마음대로 확대해석해선 안된다고 경계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연합뉴스
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지적사무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유·무죄나 양형 등 실체적 판단에 대한 개입은 불가능하고, 절차와 관련한 명백한 오류를 잡는 정도만 가능하다는 식으로 논리를 더 보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대법원까지 유죄 결론을 유지하려면 항소심을 맡는 서울고법에서 보다 치밀하게 논리를 구성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들의 항소심 결과가 언제,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1심 결과도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국회의 탄핵은 물론 법원 내부 징계로도 문책하지 못한 채 형사법정에 떠넘겨진 사법농단 후처리가 결국 돌고 돌아 대법원으로 돌아오는 날. 김명수 대법원장이 어떤 판결을 내리게 될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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