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재판서 '자백 없는 합의' 감형 사라질까

무죄 주장하면서 "피해자에겐 죄송" 합의 시도 괜찮나
양형위, 내달 17일 합의 관련 양형 원칙 수립 예정
"합의에 자백 전제하는 건 위험" 지적도

연합뉴스
"피고인이 범죄 혐의를 부인하고 있기 때문에 피해자와 합의(처벌불원) 했다고 해서 보석 석방할 순 없다."

   
당사자 간 분쟁인 민사재판뿐 아니라 형사재판에서도 '치트키'처럼 쓰여 온 '피해자와의 합의(처벌불원)' 요소를 판단하는 법원의 태도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28일 CBS노컷뉴스 취재에 따르면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다음 달 17일 전체회의를 열고 '합의 관련 양형요소'에 대한 기본 원칙을 정할 예정이다. 지난 19일 열린 전문위원 전체회의에서는 현재 44개 범죄군에 개별적으로 규정된 '합의'에 대한 정의와 반영정도 등을 통일하고 범죄 특성별로 구분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가 이뤄졌다.
   
진지한 반성이 전제되지 않았지만 합의는 성사된 경우 또는 진지한 반성이 인정됨에도 합의에는 실패한 경우 등 다양한 사례들에 대해 범죄 특성에 따라 3~4개 군으로 나누어 통일된 판단 기준을 수립할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단순 재산 범죄의 경우 금전피해 회복에 방점을 찍고 양형 판단을 한다면, 금전으로 완전한 보상이 어려운 인격이나 신체에 대한 침해 범죄의 경우 합의의 전제 조건으로 진지한 반성 여부를 더 꼼꼼히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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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처벌불원을 형사재판에서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와 관련한 문제의식은 수년 전부터 축적돼왔다. 양형위원회는 2018년 7월 양형연구회를 창립하면서 첫 심포지엄 주제로 '양형인자로서 합의'를 검토했다. CBS노컷뉴스 취재에 따르면 당시 양형위 상임위원이었던 천대엽 대법관은 피고인·피해자 국선전담변호사들과 별도로 비공개 간담회를 열어 의견을 수렴하기도 했다.
   
당시 간담회에서 천 대법관과 국선전담변호사들은 "특히 성범죄 사건에서 피고인이 기본적인 사실관계 등 혐의를 부인하는 상황에서 피해자와 합의를 했다고 해서 유리하게 반영해선 안 된다"는 원칙에 대해 공감대를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성범죄 양형기준에서는 '처벌불원'에 대해 △피고인이 자신의 범행에 대해 진심으로 뉘우치고 △합의를 위한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 피해에 대한 상당한 보상이 이뤄졌으며 △피해자가 처벌불원의 법적·사회적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면서 이를 받아들여 피고인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 경우라고 정의하고 있다. 피고인의 반성과 상당한 보상, 피해자의 인식 3박자가 모두 갖춰진 합의(처벌불원 의사표시)가 이뤄졌을 때만 감형이나 집행유예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무적으로는 이같은 조건이 제대로 심리되지 않아 문제로 지적돼 왔다. 특수준강간으로 기소된 가수 최준영은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지만 2심에서 피해자와 합의해 처벌불원서가 제출되면서 2년 6개월로 감형됐다. 당시 재판부는 "최씨가 (혐의를 부인하는 등) 진지한 반성은 부족하지만 피해자와 합의한 점을 고려했다"고 밝혀 논란이 됐다. 아동이나 장애인 대상 범죄 사건에서 피해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제출된 처벌불원서가 그대로 받아들여져 감형이 되는 사례도 지속적으로 발생해 왔다.
   
그러나 피고인·피해자 변호인들은 물론이고 시민사회에서의 공식·비공식적 문제제기가 이어지면서 최근 재판 현장의 분위기도 달라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올 초 재경지법의 한 성범죄 전담 재판부는 군형법상 강간치상 등의 혐의로 구속된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금전배상을 한 후 처벌불원서를 제출하며 보석 신청을 했지만 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피고인이 여전히 범죄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상황에서 피해자에게 형식적인 처벌불원서를 받아낸 것만으로는 정상참작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해당 사건의 피해자를 대리한 A 변호사는 "피해자의 처벌불원 의사와 피고인의 진지한 반성에 대한 심리가 점점 엄격해지고 있다는 것을 재판 현장에서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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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같은 분위기 가운데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합의를 양형에서 고려할 때 '진지한 반성'을 너무 엄격하게 심리하게 되면 사실상 피고인에게 자백을 강요하는 꼴이 될 수 있다"며 "진지한 반성 판단은 결국 기준에 명시하기 보다는 재판부 재량에 맡겨둘 수 밖에 없는 영역"이라고 설명했다.
   
피고인의 반성과 교화에 대한 여지를 많이 열어둠으로써 '진정 반성하는 피고인'을 선별해낼 수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성폭력 재판부 사건을 주로 다루는 한 국선전담변호사는 "엄벌도 중요하지만 피고인이 정말 반성하고 노력하는 부분에 대해 양형에서 확실히 반영해줄 필요성도 크다"며 "그게 어려워질수록 변호인들은 피고인에게 무죄 주장과 동시에 합의라는 '투트랙 전략'을 권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생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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