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이순신과 김연경과 안산

도쿄올림픽 선수촌의 우리 선수단 숙소에 "우리에게는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다"는 이순신 장군의 비장한 각오를 인용한 응원 문구가 내걸렸을 때, 일본이 보인 반응은 정말 치졸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제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를 공공연하게 내걸고 광기 어린 응원을 일삼던 일본인들이 그것도 해석을 해야 이해가 가능한 한글로 쓰인 문구를 문제 삼는 것을 보면서, 우리를 향한 일본의 경계심이 상당하다는 사실을 역으로 깨닫게 된다.
 
2020도쿄올림픽 대한민국 여자배구팀 주장 김연경 선수와 양궁 안산 선수. 이한형 기자·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도쿄올림픽은 사상 최악의 상황에서 치러지고 있다. 코로나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고, 선수촌에서 제공되는 식사는 방사능 오염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여기에 골판지로 만들어진 침대가 말해 주듯 선수촌의 환경도 열악한 데다, 관중마저 없는 썰렁한 경기장에서 선수들은 스스로를 격려하며 경기에 임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선수단은 양궁을 비롯해 각 종목에서 선전을 펼치며 코로나에 지친 우리 국민들에게 큰 위안을 선사하고 있다. 그런데 선전을 펼치고 있는 젊은 선수들의 노력과 열정에 반해 정작 한국에서는 뜬금없이 페미니즘 논란이 제기되는 등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15일 도쿄 하루미 지역 올림픽선수촌의 한국 선수단 숙소에 태극기와 '신에게는 아직 5천만 국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남아 있사옵니다'라는 문구가 걸린 모습.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김연경이 이끄는 우리 여자배구팀은 이번 올림픽에서 큰 기대를 받지 못했다. 학교폭력 파문으로 대표팀의 핵심이었던 이재영, 이다영 자매가 제명되면서 전력에 큰 공백이 생겼고, 같은 조에 편성된 팀들이 모두 우리보다 올림픽 랭킹이 높은 강팀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려와는 달리 우리 선수단은 세계 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브라질에 패했을 뿐 도미니카와 숙적 일본까지 격파하며 8강에 진출하는 성과를 이뤘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고비이자 승부라고 할 수 있는 일본과의 경기를 공중파TV에서는 볼 수 없는 상황이 빚어졌다.  
 
여자팀이 일본과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열전을 치르고 있는 동안 우리 공중파 TV에서는 야구와 축구 경기만 중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시청권이 사실상 제한된 것이다. 인기종목에만 매달리는 방송사 덕분에 우리 여자 배구선수들은 화면 너머 국민들의 응원마저 제대로 받지 못한 셈이다.
지난달 31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아레나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여자 배구 에이(A)조 4차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김연경이 공격하는 모습.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방송사들은 축구경기가 모두 끝난 후에야 역전극을 펼치고 있는 여자배구경기의 5세트 경기를 인심 쓰듯 겨우 내보냈다. 여기에 한술 더 떠 최악의 중계 참사를 빚었던 MBC는 김연경 선수의 인터뷰를 방송하면서,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막을 내보내는 실수를 또 빚고 말았다.
 
일본이 응원 문구를 철거해달라는 무례한 요구를 한 것과, 인기종목에만 매달려 여자 배구를 소홀히 대한 방송사들의 구태의연한 태도는 다르지만 묘하게 비슷한 시각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이순신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아있었고, 여자배구팀도 꼭 12명이니 그것도 참 이상한 우연이다.
 
사상 최초로 양궁 3관왕에 오른 안산 선수를 둘러싼 논란은 어떤가. 안 선수의 짧게 자른 머리와 SNS에 올린 단어를 문제 삼아 '페미' 논쟁을 촉발한 일부 남성들의 한심한 행태는 국제적으로도 큰 망신을 샀다.
지난달 30일 일본 도쿄의 유메노시마공원 양궁장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양궁 여자 개인 결승에서 과녁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안산 선수 모습.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여기에 격려와 응원은 못 해줄망정 정치권까지 안 선수 논란에 가세하면서 혼란만 가중하고 있다. 특히 국민의 힘 양준우 대변인은 이번 페미 논란이 안 선수의 남성혐오 용어사용에 있다는 취지의 논평을 내놓아 논란을 부추겼다.

페미 논란은 정당의 대변인이 다뤄야 할 적절한 사안도 아닐뿐더러, 부당한 피해를 당하고 있는 안 선수가 이 문제에 책임이 있는 것같이 평가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설령 안 선수가 페미니스트인들 그게 정치권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고, 논쟁을 불러일으킨 일부 네티즌의 극단적인 시각을 담고 있는 것 같아 불쾌하기까지 하다.
지난달 30일 2020 도쿄올림픽 양궁 여자 개인 결승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울고있는 안산과 다독여주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그 부담감을 이겨내며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기쁨 소식을 안긴 선수라는 사실은 잊혀지고, 본질과는 다른 엉뚱한 페미니즘 논란이나 벌이는 정치권의 한심한 모습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린 선수들이 가슴에 달고 있는 태극기를 자랑스러워하는 만큼, 과연 우리는 우리들의 대표 선수들을 자랑스럽게 그리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돌이켜본다. 애국심이 가장 고취되는 올림픽 시즌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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