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리뷰]'70년전쟁'의 끝…조건없는 종전선언이 답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유엔 총회장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한반도 종전선언을 제안하는 것은 이제 익숙한 풍경이 됐다. 유엔 총회라는 무대만 달라졌을 뿐 임기 중 세 번째 같은 주장을 되풀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전선언이 식상한 담론이 될 수는 없다. 70여년 끌어온 한반도 전쟁 상태를 법적, 최종적으로 끝내야 한다는 점에서 이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다.
 
그럼에도 그간의 장구한 세월 탓인지 이제는 비정상이 정상으로 보이는 착시와 혼돈을 낳고 있다. 이를 부추기는 것은 종전선언의 의미를 왜곡, 과장해 유포하는 일단의 국내외 세력이다.
 

문 대통령 "종전선언은 평화협정의 입구, 법적 지위 없는 정치적 선언"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유엔 총회장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종전선언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정치적 선언이다. 문 대통령은 법률가 출신답게 "종전선언은 평화협정을 위한 협상에 들어가는 입구이자 일종의 정치적 선언이다. 법적 지위가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간명하게 설명했다.
 
선언과 협정을 혼동하는 것은 참사를 부를 수 있다. 사실 냉엄한 국제관계에선 협정마저도 휴지조각이 될 수 있다. 과거 소련과 독일의 불가침조약이 일방 파기된 사례가 잘 말해준다.
 
북한이 23일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과 리태성 외무성 부상 담화를 통해 미국의 적대시 정책이 남아있는 한 종전선언은 허상이라고 밝힌 것은 이런 우려를 반영한다.
 
북한은 "우리를 둘러싼 정치적 환경이 달라지지 않고 미국의 적대시 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종전을 열백번 선언한다고 하여도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 교수는 "종전선언의 상징성과 정치적 의미를 인정한 것은 반대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내포한다"면서도 "미국 전략무기의 한반도 전개 등 대북적대 정책이 종료되지 않는 한 종전선언은 유효성이 없다고 항변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北 "종전선언은 허상…적대시정책 가릴 은폐막" 피해망상적 반응

지난 24일 경기도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바라본 임진강변 북한 초소에 북한군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북한이 종전선언의 정치적 의미마저 낮춰 보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비록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종전선언을 위해서는 남북한과 미국, 또는 중국까지 어찌됐든 머리를 맞대야 한다.
 
북한이 바라는 북미 수교와 평화협정을 위해서라도 종전선언의 입구를 어떻게든 통과해야 한다. 이런 과정 자체가 한반도 긴장을 낮추고 대화 여건을 만들며, 어쩌면 제재 완화 분위기까지 자아낼 수 있다.
 
북한이 이번에 "종전선언이 현 시점에서 조선반도 정세 안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미국의 적대시 정책을 은폐하기 위한 연막으로 잘못 이용될 수 있다"고 한 것은 과도한 피해망상이다.
 
"미국 남조선 동맹이 계속 강화되는 속에서 종전선언은 지역의 전략적 균형을 파괴하고 북과 남을 끝이 없는 군비경쟁에 몰아넣는 참혹한 결과만을 초래할 것"이라는 주장도 상식적이지 않다.
 

北과 달리 美는 종전선언 과대평가…대북제재 이완, 미군 철수 우려

북한이 종전선언을 과소평가한다면 미국과 국내 보수진영에선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평화협정이 아니라 종전선언만 이뤄져도 대북 봉쇄가 이완돼 비핵화 협상 동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북한이 종전선언을 근거로 주한미군 철수와 유엔사 해체를 요구할 명분이 강화될 것이란 우려도 함께 제기된다. 따라서 종전선언을 위해서는 북한의 비핵화가 선행돼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주한미군. 연합뉴스
하지만 종전선언과 주한미군 철수를 연결하는 것은 기우에 가깝다. 북한 스스로 종전선언이 종이장에 불과하다고 한 것은, 종전선언을 근거로 과도한 요구를 할 수 없게 만든다. 종전선언은 한반도 기류를 반전시키는 모멘텀 이상 이하도 아니다.
 
종전선언을 대가로 북한의 선비핵화를 요구하는 것 역시 문제가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등가성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심지어 평화협정이 체결돼도 실질적 안전이 담보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이 원하는 체제 보장은 평양 시내에 맥도날드 햄버거가 입점하는 그림이다. 최근 빈센트 브룩스 전 주한미군 사령관의 제안처럼 북한도 친미국가로 대우해달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북한이 어떤 경우에도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일각의 비관론은, 뒤집어 보면 북한의 안전보장이 그만큼 쉽지 않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북미 간극 좁히기 韓 역할 주목…김여정 "좋은 발상" 대화 여지

연합뉴스
결국 종전선언을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간극을 좁히는 것은 우리 정부의 몫일 수밖에 없다. 북미 간극의 핵심은 한쪽은 종전선언의 의미를 과소평가하고 한쪽은 과대평가한다는 점이다.
 
이런 인식의 차이로 인해 북한은 적대시정책 철회, 미국과 국내 일각에선 선비핵화 조치라는 전제조건을 제시하며 팽팽히 맞서왔다. 문 대통령의 말처럼 종전선언이 법적 구속력 없는 정치적 선언임을 이해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 무려 70여 년 지속돼온 것이다.
 
종전선언은 그 자체로 선이며 당위성이 있다는 점에서 뚜렷한 이유 없이는 누구도 반대하기 힘들다. 따라서 종전선언을 위해 어떠어떠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식의 주장은 논리적으로나 명분상으로나 근거가 빈약하다.
 
그런 점에서 조건 없는 종전선언에 동의하느냐 여부가 한반도 평화·안정 세력을 가려내는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임기 말 문재인 정부에게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재가동할 거의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 듯하다.
 
북한은 문 대통령의 제안에 즉각 화답하듯 이례적으로 빠르게 반응했고, 여전히 신중하긴 하지만 김여정의 입을 통해 "흥미 있는 제안이고 좋은 발상"이라며 대화의 여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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