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막판까지…나아질 조짐 없는 법원의 고질병

문재인 정부 끝나가는데도… 사법부 고질적 병폐 '사건 들고있기' 관행 여전
대법원 문형표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사건 4년째 감감 무소식, 울산시장 선거개입 사건은 1심공판만 2년째
이해할 수 없는 재판 지연, 피해자-피고인-사회의 피해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병 치료차 입원하기 위해 7월 2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연합뉴스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 특별사면 뉴스를 접하면서 많은 이들이 2016년 겨울, 전국을 촛불로 뒤덮게 만들었던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종막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법원에서 국정농단·사법농단 등 문재인 정부가 최우선 청산 과제로 여겼던 '적폐' 사건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다는 혐의로 구속 기소된 문형표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 사건은 대법원에서만 4년째 기약 없는 기다림을 이어가고 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실행을 지시한 혐의를 받는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의 파기 환송심 공판도 남아있다. 사법농단의 핵심,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3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1심 판결조차 나오지 않고 있다.
 
'사건 들고 있기'란 의도적으로 판결을 미루는 사법부의 악습을 지칭하는 법조계 은어다. 재판부가 결론을 내리지 않는 이유는 다양하다. 과거 전관을 비롯한 학연·지연 등 인맥을 통한 청탁이 대표적이었다면, 최근 재판부 자체의 다양한 예단이나 정치 권력과 여론의 압박 등에서 오는 부담감 등이 재판의 발목을 잡고 있다. 검찰개혁·사법개혁을 강조했던 문재인 정부에서도 정치 권력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거나 사회적 갈등이 첨예하게 맞물린 재판 다수가 '의도적'인 것으로 의심되는 더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압력 행사 문형표 사건, 대법서 감감무소식

 
[연합뉴스TV 제공] 연합뉴스
앞서 언급한 문형표 전 이사장과 홍완선 전 본부장 사건은 여타 국정농단 사건들 가운데서도 대법원에서 멈춰선 비상식적인 사례다. 두 사람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공단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다는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특정경제범죄처벌법상 배임 등 혐의)로 지난 2017년 1월 구속 기소됐다. 같은 해 6월 1심에서 2년6개월의 실형이 선고됐고, 같은 해 11월 2심 재판부는 1심과 같은 형량을 선고했다.

구속기소에서 2심 선고까지 1년도 걸리지 않으며 속성으로 진행되던 재판은 대법원 상고 과정에서 돌연 정지됐다. 대법원 2부 당시 권순일 대법관 주심 사건으로 배당된 이후 재판은 올 12월로 4년째를 맞이하지만 아무런 진척이 없다. 대법원의 침묵이 계속되자 박영수 특검이 올해 2월, 한 달 뒤에는 홍 전 본부장측 변호인인 법무법인 케이씨엘에서 의견서 등을 통해 대법원의 신속한 선고를 재촉했지만 어떤 반응도 없었다.

대법원이 사건을 들고 있는 동안 구속됐던 문-홍 두 피고인은 구속기한이 만료돼 석방됐고 한 수산업자와 부적절한 관계가 드러난 박영수 특검마저 사퇴하면서 기소가 제대로 유지될지 불투명해진 상황이다.
 

기소 1년 5개월 만에야 1심재판 열린 울산시장 선거개입 사건


청와대 하명수사 및 선거개입 의혹 관련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송철호 울산시장이 1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첫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황진환 기자
문재인 정부 핵심인사들이 대거 연루된 청와대 울산시장 선거개입 재판은 난맥의 연속이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지난해 1월 송철호 울산시장과 황운하 전 울산지방경찰청장, 백원우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 한병도 전 정무수석 등 여권 핵심 인사 13명을 무더기로 불구속 기소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절친인 송 시장을 지난 2018년 지방선거에서 당선시키기 위해 청와대가 당시 울산시장이던 김기현 현 국민의힘 원내대표와 측근에 대한 표적수사를 울산지방경찰청에 지시했다는 혐의가 적용됐다.

살아있는 권력을 겨냥한 재판은 무엇 하나 순탄치 못했다. 정식 재판을 열기 위한 사전 작업인 준비기일을 여는 데만 3개월이 소요되면서 진을 빼놨다. 첫 준비기일에서 검찰과 변호인 측이 수사기록 열람·등사를 놓고 공방을 벌인 이후 준비기일만 4차례나 공전하다 해를 넘겼다. 올해 3월 준비기일이 재개됐지만 해당 재판부가 인사이동으로 교체된데다 4월에는 주심인 김미리 부장판사가 돌연 휴직을 하면서 정식재판은 올해 5월에서야 겨우 시작할 수 있었다. 지난 11월, 처음으로 전임 울산시장이었던 김 원내대표가 증인으로 법정에 서는 등 재판은 기소 22개월이 지나서야 정상궤도에 오르는 모양새다.
 
1심 재판이 제길을 찾는데 2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면서 피고인들의 상황도 많이 달라졌다. 한병도 전 정무수석과 황 전 청장은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됐고 의혹 당사자인 송 시장은 내년 지방선거때까지 임기만료를 앞두고 있다. 이 사건의 대법원 확정 판결이 언제 나올지는 예상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다.
 

5년이 다돼도 결론 없는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책임


26일 부산고법 앞에서 선사 회장 등에 대한 2심 판결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스텔라데이지호대책위원회 허경주 부대표(왼쪽)와 허영주 공동대표(오른쪽). 박진홍 기자
철광석 26만톤을 운반하던 초대형 광석운반선 스텔라데이지호는 선장·기관사·항해사 등 한국인 8명과 필리핀인 16명을 태운채 지난 2017년 3월31일 우루과이 인근 남대서양 해역에서 침몰했다. 사고가 발생하자 주변을 지나던 선박들이 동원돼 수색·구조작업을 진행했지만 사고 추정지점 수심이 약 3천m에 이르는 등 갖은 악조건이 겹치면서 필리핀 선원 2명 외에 선원 22명은 끝내 구조할 수 없었다.

스텔라데이지호가 LNG선을 화물선으로 개조한 노후 선박인데다 항해 도중 선박에 크랙이 발생하는 등 문제가 많았다는 점, 선사인 '폴라리스 쉬핑'의 늑장 대처 논란 등이 겹치며 '제2의 세월호 참사'로 여겨지기도 했다. 사고가 발생하자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사고 선원 가족들을 만나기고 했다. 하지만 사고 발생 5년이 가까워오는 2021년말까지도 사고원인 규명은 물론 책임자 처벌도 확실하게 이뤄진 것이 없다.

검찰은 사고 발생 23개월이 지나서야 선사 관계자들을 기소했다. 부산지검은 2019년 2월 폴라리스쉬핑 김완중 회장 등 선사 관계자 12명을 선박안전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부산지방법원은 기소 1년여 만인 이듬해 2월 폴라리스쉬핑 김 대표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폴라리스쉬핑 법인에는 벌금 1500만 원을 선고하면서 솜방망이 처벌 논란에 휩사였다. 상급심이 김 대표 등에게 좀더 중한 형량을 선고한 판단이 나오기까지는 1년 3개월이 더 필요로 했다. 부산고법은 지난 5월 김 회장에게 징역 6월의 실형을 선고했지만 코로나로 인한 구치소 상황 등을 고려해 법정구속하지는 않았다.

재판은 대법원으로 무대를 옮겼지만 김 회장이 자신의 유죄근거가 된 선박안전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하면서 기약없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22명 희생자들에 대한 책임 소재가 언제쯤 결론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
 

법원의 침묵…피해자와 피고인, 사회의 고통으로…


[연합뉴스TV 제공] 연합뉴스
대한민국 헌법은 제27조 3항에서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다. 사법부는 미국이나 기타 다른 국가의 형사재판 절차와 비교할 때 우리나라의 공판절차가 오히려 신속한 편에 속한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건에 대해서 유독 법원이 소극적으로 일관한다는 비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재판의 지연은 단순한 재판부 편의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늘어나는 재판 기간은 피고인과 피해자 모두에게 막대한 재정적·정신적 피해를 야기하는 인권의 문제다. 법인대표의 형사재판이 지연되면 기업에까지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권력형 비리 사건에 대한 결론이 늦어지면 사회정의 구현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재판을 고의로 지연시켰다는 이유로 전직 대법원장마저 기소한 문재인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에도 '사건 들고있기'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 법원의 냉정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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