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갇힌 차에서 흉기 피하려 '공포 속 저항'…과잉방위 무죄

외도 의심한 동거남, 동거녀 차량 태우고 흉기 위협
욕설에 음주운전까지…몸싸움 벌이다 동거남 흉기 찔려
검찰 "자신 생명 위해 다른 생명 해하는 건 과잉방위 아닌 공격행위"
변호인, 형법 21조 3항 '야간·당황 상태선 과잉방위 가능' 무죄 주장
배심원 7명 만장일치 '무죄'…재판부 "21조 3항에 해당"

스마트이미지 제공

술에 취해 차 안에서 흉기를 들고 위협하는 동거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다 흉기를 휘두른 40대 여성이 '과잉방위'를 인정받아 국민참여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과잉방위는 늦은 밤이나 공포에 빠진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과한 수준'으로 방어한 행동인데, 과잉방위로 무죄를 선고받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인 사례로 꼽힌다.

지난 11일 오후 수원지법 301호 재판정. 형사15부(조휴옥 부장판사) 심리로 국민참여재판이 열렸다.

피고인은 특수상해 혐의로 기소된 A(42·중국동포)씨. A씨는 지난해 8월 18일 오전 12시 7분쯤 경기도 수원에서 이동 중인 차량 조수석에 앉아 운전석에 있던 동거남 B(50·중국동포)씨의 가슴팍을 흉기로 한 차례 찌른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A씨는 평소 B씨로부터 폭언을 듣거나 폭행에 시달려왔다. 2018년과 지난해에는 B씨에게 맞은 충격으로 고막이 터져 치료를 받기도 했다.

범행 당일 : 늦은 밤, 좁은 차 안, 흉기 위협


사건 전날인 지난해 8월 17일 자정에 가까운 시각, 친오빠 집에 다녀 온 A씨는 B씨에게 추궁을 당했다. 친오빠가 아닌 다른 남자와 하룻밤을 지내고 온 게 아니냐는 것. 술에 취한 B씨는 '친오빠를 죽이겠다'며 집에 있던 흉기를 챙겼다.

상황을 지켜보던 A씨도 뒷주머니에 몰래 과도를 넣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무방비 상태인 오빠에게 건네주기 위해서였다.

A씨는 B씨의 협박을 받고 차량에 탔고, 악몽같은 시간이 시작됐다. B씨는 술을 마신 채 좁은 골목길을 내달렸다. 한 손은 운전대를 잡고 있었지만, 다른 한 손은 흉기를 쥐고 있었다. 그는 조수석에 앉아있는 A씨의 목에 흉기를 갖다 대기도, 흉기로 허벅지를 내리치기도 했다. 그러면서 쉴 새 없이 욕도 내뱉었다.

그러다 차량이 정차한 사이, 차 안에서 몸싸움이 벌어졌다. A씨가 몰래 챙겨온 과도로 B씨의 오른쪽 가슴을 한 차례 찌른 것. 차에 탄 뒤로 내내 흉기위협 등 공포 속에 있던 A씨가 저항했다.

재판정에 선 A씨는 "바로 옆 운전석에서 목과 몸에 흉기를 갖다 대며 위협하는데, 신음소리만 내도 큰 일이 날 것 같았다"며 "당시 너무 두려워서 B씨가 어떻게 칼에 찔렸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과잉방위 아닌 공격" VS "늦은 밤, 공포 상황…과잉방위"

수원법원종합청사. 연합뉴스

검찰은 A씨가 몰래 챙긴 과도로 B씨의 가슴팍을 한 차례 찔렀다고 공소 이유를 밝혔다. 또 A씨의 행위는 정당방위나 불가벌적 과잉방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피고인은 (차량에 타기 전) 경찰에 신고하거나 친오빠한테 미리 연락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며 "오히려 미리 범행도구를 준비하고 상해를 가한 것은 정당방위나 과잉방위가 아닌 공격행위"라고 했다.

이어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서슴없이 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법질서의 역할을 경시하는 것"이라며 "다만 피해자가 범행을 유발한 측면이 있고, 처벌도 원하지 않는 상황"이라며 A씨에 대해 징역 1년과 흉기 몰수를 구형했다.

반면, 변호인 측은 A씨가 B씨를 찔렀다고 하더라도 무죄에 해당되는 '과잉방위'라고 주장했다.

변호인이 근거로 제시한 건 형법 제21조 3항. 이 조항은 '야간이나 공포, 경악, 흥분, 당황한 상태에서 한 행위'일 경우엔 과잉방위로 인정해 처벌하지 않도록 정하고 있다.

즉, 늦은 밤 흉기를 든 동거남에게 협박을 당해 차량에 탑승하고, 욕설과 폭행까지 당하는 등 A씨는 과잉방위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배심원의 판단은 어땠을까. 배심원 7명은 특수상해 인정(인정 4명·불인정 3명), 정당방위 불인정(인정 1명·불인정 6명)했다.

하지만 형법 제21조 제3항 과잉방위(불가벌적 과잉방위)에 대해선 만장일치로 인정된다고 판단하면서 무죄 평결을 했다.

재판부도 같은 입장을 내고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의 범죄사실은 배심원 전원이 평결하는 바와 같이 형법 제21조 제3항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여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다"고 판시했다.

배심원 만장일치 '무죄' 이끈 '형법 제21조 제3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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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법 제21조 제3항, '과잉방위'가 인정되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것으로 파악된다.

그나마 알려진 사례는 2018년 발생한 '죽도 폭행' 사건이다. 피고인이 같은 건물 세입자와 그의 모친을 죽도로 때려 각각 전치 6주·3주가 나오게 한 사건이다.

당시 순간의 소통 문제로 세입자와 피고인의 딸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잠에서 깬 피고인은 세입자가 자신의 딸을 잡고 있는 모습을 목격, 죽도를 들고 급하게 뛰쳐나왔다. 이어 죽도로 세입자를 때렸고, 자신을 말리는 세입자의 모친까지 수차례 가격했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열린 1심에서 배심원단은 피고인의 행동이 제21조 제3항에 해당된다고 판단했다. 즉 과잉방위를 인정한 것. 다만, 이 사건은 과잉방위뿐 아니라 정당방위도 함께 인정받은 사건이다.

또다른 판례를 찾기 위해선 5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4년 대법원에서 확정판결 난 사건으로, 밤 10시 40분쯤 자신과 가족을 향한 갑작스런 폭행에 대응하다 상대방을 숨지게 한 사건이다.

당시 C씨는 길거리에서 만난 D씨와 그의 딸에게 접근했다. D씨가 이를 제지하자 그를 폭행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돌덩이로 D씨의 아내를 내리치려고 했다. 이를 막으려던 D씨가 C씨의 복부를 발로 한 차례 가격했는데, 이 충격으로 C씨는 결국 사망했다.

하지만 당시 재판부는 D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행위는 당시 야간에 술에 취한 D씨의 불의의 행패와 폭행으로 인한 불안스러운 상태에서의 공포, 경악, 흥분 또는 당황에 기인됐던 것"이라며 "형법 제21조 제3항이 따라 피고인은 무죄"라고 판시했다.

A씨를 변호한 법무법인 해담의 양승철 변호사는 "A씨는 음주운전 차량에 감금돼 흉기로 협박을 당하면서, 자신의 생명과 신체에 대하여 위험이 있던 상황"이라며 "우리 법원은 그동안 정당방위나 과잉방위에 대해 매우 소극적이었고, 정당방위는 10여 건, 과잉방위로 무죄를 받은 경우는 그 사례를 찾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 판결은 사실상 사문화돼있던 과잉방위 무죄 규정이 현실에 적용된 매우 드문 사례"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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