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컷 리뷰]'피의 군주' 황정민에게 연민을 느꼈다…리차드3세

샘컴퍼니 제공
"날 봐. 좋은 핏줄로 태어났지만 거칠게 만들어졌지. 절름대며 걷는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전쟁터에서 승리를 이끌었지만 저기 오고 가는 수많은 덕담 속에 내 이름을 벌써 사라졌어. (중략) 나 리차드는, 이 순간 이후부터 저들보다 훌륭한 배우가 되겠어."


무대의 불이 켜지는 것과 동시에 등장한 리차드3세는 무대 양쪽 끝을 오가며 관객에게 선언하듯 독백했다. 도입부의 이 대사는 리차드3세가 벌이는 폭주의 전주곡이나 다름 없다. 희대의 악인이었던 그는 때론 분노를 유발하고 때론 연민을 자아내는 명연기로 세상을 감쪽 같이 속인다. 그리고 이내 외친다. "이제 내가 왕이다."

리차드3세는 셰익스피어의 초기 희곡이다. 연극은 영국 장미전쟁 당시 실존했던 요크가의 마지막 왕 리차드3세가 왕관을 손에 넣기 위해 일삼는 악행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악행은 상상을 초월한다. 음모를 꾸며 왕좌에 있는 첫째 형 에드워드4세와 둘째 형을 죽게 만들고, 정적은 물론 왕위 계승 서열에 가까운 조카들까지 숙청한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경쟁구도에 있던 형수 엘리자베스 왕비의 딸을 아내로 삼겠다는 계획까지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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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3세가 내뿜는 광기를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그의 볼품 없는 외모에 시선이 멈춘다. 굽은 등과 말라 비틀어진 듯 움츠러든 왼쪽 팔. 리차드3세의 왕관을 향한 무자비한 권력욕은 신체적 장애로 한평생 무시와 외면을 받으면서 쌓인 열등감과 결핍에서 비롯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갖은 권모술수로 무장한 채 폭주하는 리차드3세에게서 동정과 연민을 느끼게 하는 지점이다.

리차드3세 캐릭터는 황정민의 열연 덕분에 살아 숨쉰다. 2018년 초연에 이어 4년 만에 다시 무대에 선 그는 콤플렉스로 인해 뒤틀린 리차드3세의 영혼을 능청맞게 표현했다.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한다. 100분 내내 등을 잔뜩 구부린 채 자유자재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모습은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극의 마지막 부분, 리차드3세는 무대와 함께 하강하면서 "내가 지은 죄를 묻는, 그대들의 죄를 묻고자 한다"고 소리친다. 또한 요크가로 인해 가문이 쇠락한 후 이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다니는 마가렛 왕비(정은혜)는 "그대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 그대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라고 묻는다. 리차드3세가 죄악의 씨를 틔우는 동안 우리가 애써 외면해온 것들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라는 의미다.

엘리자베스 왕비 역의 장영남, 에드워드 4세 역의 윤서현, 마가렛 왕비 역의 정은혜 등 출연진의 합이 좋다. 고전극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다. 황정민은 "클래식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배우 각자의 에너지가 더 큰 에너지가 되어 관객과 소통하는 것이 매력"이라고 했다. "'악행은 내가 저지르고 통탄할 책임은 남들에게 미루는 손쉬는 방법'이라는 대사는 요즘 시대에도 맞춤하다"고 무릎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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