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터뷰]'미싱타는 여자들' 두 감독의 여성 노동자 기억법

다큐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이혁래·김정영 감독
1977년 9월 9일, 그날을 기억하다
<부록> 영화가 19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을 기억하는 방법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의 김정영, 이혁래 감독. ㈜영화사 진진 제공
'7번 시다' 혹은 '1번 미싱사' 등 항상 번호로만 불렸던 10대 여성 노동자들에게도 자신만의 이름이 있었다. 그들은 번호로 불리길 거부했고, 노동자로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가장 먼저 나서서 행동했다. 이들의 역사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제대로 기록되지도, 알려지지도 않았다.
 
이러한 1970년대 평화시장 여성 노동자들 이야기가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을 통해 보다 제대로, 보다 많은 사람에게 전달됐다. 서울 지역 32명의 봉제 노동자에 관한 인터뷰 질문지 만들기로 시작한 작업은 오랫동안 깊이 숨겨둔 이야기를 기록하는 과정으로 나아갔다.
 
봉준호 감독은 이들 여성 노동자를 두고 "전태일 말고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라고 말했다.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미싱타는 여자들' 이혁래, 김정영 감독에게 19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을 어떻게 기록하고, 어떻게 기억하고 싶었는지 물었다.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의 삶은 아름답고 빛났다


▷ 숨쉬기조차 힘든 좁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해야 했던 당시 노동자를 위로하는 듯한,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에서 촬영한 오프닝은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이혁래 감독(이하 이혁래) : 세 주인공이 미싱을 돌리는 장면을 넣는 것은 시네마달 김일권 대표의 아이디어였어요. 김정영 감독과 함께 촬영 장소에 대한 아이디어를 논의했죠. 우리는 40여 년 전 주인공들이 일했던 어둡고 좁고 탁한 환경과는 정반대인 밝고 탁 트이고 공기도 맑은 곳에서 미싱을 돌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세 분 주인공이 매우 즐겁게 미싱을 돌리고 추억을 이야기하며 촬영에 임하셔서 아주 뿌듯했죠.
 
▷ 오프닝 외에도 초상화 작업, 합창 등 장면들도 인상 깊었습니다. 마치 당시 어린 노동자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는 과정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혁래 : 아픈 과거사를 기록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될 것 같았어요. 출연진이 들려준 이야기는 아픈 기억이기도 하지만, 그걸 왜 여태껏 숨겨 오셨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답고 가슴 뛰는 이야기였죠. 출연진이 과거를 들려줄 뿐만 아니라 다시 한번 체험하도록 하고 싶었어요. 그때 그 시절의 나를 만나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는 삶이었는지 확인하도록 하고 싶었죠. 그래서 용기를 내서 이야기하길 잘 했구나 생각하시길 바랐습니다.

노석미 화가의 화풍이 돋보이는 초상화와 캘리그래피로 완성된 포스터. ㈜영화사 진진 제공
​​​​▷ 편지, 사진 등 지극히 사적인 기록물을 통해 과거 어린 여성 노동자의 삶의 단편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감독들에게는 어떤 감정을 전달했을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김정영 감독(이하 김정영) : 애틋하고 슬펐어요. 내 어린 시절 사진보다 이분들의 사진이 더 많았어요. 노조의 행사 기록이 이분들의 소녀 시절 역사를 만들어 준 것이기도 한 거죠. 임미경 선생님의 편지는 친구들의 맘이 소박하게 솔직하게 나와서 무엇보다 소녀 시절을 복기하는데 딱이었어요.
 
이혁래 : 이숙희 선생님께서 엄청나게 많은 사진을 보내주셨을 때 깜짝 놀랐고, 사진을 보고는 더 놀랐어요. 너무 아름답고 가슴이 뭉클해졌어요. 마치 오랫동안 장롱 깊숙이 숨겨졌던 엄마의 옛 사진첩을 꺼내 본 느낌이랄까요? 단순히 70년대 평화시장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를 넘어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보편적인 여성의 이야기가 거기 있었어요.
 
'시다'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십 대의 이야기였고, 투쟁의 기록이 성장의 기록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죠. 오래전부터 성장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특정 시대의 역사적 사실에 그치지 않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겠다는 기대가 생겼어요.


▷ 출연진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상 깊었던 지점은 무엇이었을까요?
 
김정영 : 임미경 선생님이 그런 판결을 내린 판사들을 '나쁜 어른'이라고 분노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월급쟁이라고 동정하며 더 넓고 깊은 연민으로 그들을 바라볼 때 어린 소녀의 속 깊은 내면에 놀라웠고 경외감이 들었어요. 일찍 어른이 된 사람들의 깊은 내면을 엿보는 거 같기도 해서 현재의 제가 부끄러웠죠.
 
이혁래 : 온 나라가 미안해 해도 모자란 피해를 입었음에도, 나이 어린 후배들에 대한 미안함을 사십 년간 간직하고 살아오셨어요. 10대의 어린 나이에도 자신을 탄압하는 판사와 형사에게 연민을 느꼈어요. 우리 영화의 출연진은 모두 나와 내 친구의 엄마들처럼 아주 평범한 분들이에요. 그러나 그들이 품고 있는 연민과 미안함의 감정을 엿볼 때마다 내 앞에 서 있는 작고 평범한 여성이 엄청나게 비범하고 거대한 인물로 보였어요.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에 등장하는 자료 중 일부. ㈜영화사 진진 제공

1970년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존재 증명'에 힘 보탠 '미싱타는 여자들'

 
▷ 이번 작품을 만들며 보람 있었던 순간이 있었다면 언제인가요?
 
이혁래 : 출연진 선생님들의 '존재 증명'에 작은 힘이나마 보탠 것이에요. 촬영이 진행 중일 때, 출연진을 포함한 청계피복노동조합 조합원 55명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국가폭력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1970년대 평화시장은 소규모 사업장이 난립하고 고용이 불안정했던 탓에 제대로 된 직원 명부가 남아있지 않았죠. 그래서 노조의 조합원이었음에도 그 사실을 입증하지 못해 피해를 인정받지 못하는 분들이 계셨어요.
 
소송을 진행하던 권두섭 변호사는 그 상황을 '존재 증명'이라는 인상적인 단어로 표현했어요. '존재 증명'을 위한 증거자료 수집에 제작진이 참여하게 됐는데, 수많은 사진과 문건을 뒤지며 증거가 될 만한 자료들을 모았죠. 결국 원고 55명 중 54명이 피해를 인정받는, 꽤 성공적인 재판 결과가 나왔어요.
 
사법적인 '존재 증명' 과정에 참여해 대단히 뿌듯했어요. 동시에 출연진 선생님들의 신뢰를 얻게 됐고, 귀중한 사진과 자료들을 제공받았죠. 이는 영화를 통해 또 다른 방식의 '존재 증명'을 하는데 큰 힘이 됐어요.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스틸컷. ㈜영화사 진진 제공
▷ 투쟁이나 노동의 역사, 운동의 역사 등에서 여성들이 분명 존재했음에도 그들의 이야기는 남성들의 그것에 비해서는 제대로 이야기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요?
 
김정영 : 처음에 1977년 9월 9일 사건을 다루는 다큐를 만든다고 했을 때, '실패한 사건'을 왜 영화로 만드는지 되묻는 분들도 계셨어요. 노동운동사에서는 규모가 큰 사건이거나 승리한 사건들만 기억돼요. 그래서 노동운동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1970년 전태일의 외침에서 곧바로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연결되는 줄 아는 경우가 태반이죠.
 
그러나 인혁당 사건을 폭로한 인권 운동가 조지 오글 목사는 이렇게 말했어요. "1980년대 중반 남성 노동자들이 스스로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십 년 넘게 정의를 위해 투쟁해 온 여성 노동자들의 어깨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전순옥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 348쪽)
 
동일방직, YH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이 주목받은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평화시장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노력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죠. '9·9사건'은 사회적인 파장이 크진 않았지만, 그때 여성 노동자들의 마음에 가장 큰 상처를 남긴 사건이었어요. 그때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고 기록하는 작업이 이제는 나와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노조가 젊은 노동자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지금 더욱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 '미싱타는 여자들'을 볼 관객들이 잊지 말고 기억해줬으면 한다는 게 있을까요?
 
이혁래 : 이분들의 이야기는 다른 어른들의 이야기와는 달라요. '내가 이렇게 잘 살아왔으니, 너희들도 나를 본 받아 잘 살아야 한다' 같은 메시지를 주입하지 않고, 오히려 '너도 지금 잘살고 있어, 우린 잘 알고 있어, 응원할게'라고 속삭여주세요. 힘들고 외로운 시기를 보내는 젊은이들이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두 명의 감독이 영화를 만들면서 그러했듯이 말이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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