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나쁜 손, 뜻밖의 선물?' 女王 3인방의 우정과 전설[베이징올림픽]

'쇼트트랙 여왕 3인방' 최민정(가운데)이 16일 중국 베이징 캐피털 실내 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500m 결승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후 은메달리스트인 이탈리아의 아리아나 폰타나(왼쪽), 동메달리스트인 네덜란드의 수잔 슐팅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또 다시 중국의 이른바 '나쁜 손(?)'에 당한 피해자가 나온 것일까. 억울함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금메달이 다름 아닌 최민정이었기에 깨끗하게 인정했다. 최민정도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3관왕은 무산됐지만 여왕 3인방의 전설이 만들어졌다. 세계 여자 쇼트트랙을 주름잡은 단거리, 중거리, 장거리의 여제들이다.

16일 중국 베이징 캐피털 실내 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500m 결승은 최고의 명승부였다. 2018년 평창올림픽 1500m와 1000m, 500m 챔피언들이 제대로 붙었다. 최민정(성남시청)과 수잔 슐팅(네덜란드), 아리아나 폰타나(이탈리아)였다.

슐팅과 폰타나는 이미 1000m와 500m에서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한 상황. 특히 슐팅은 여자 계주 3000m에서도 금메달을 따내 대회 3관왕을 노리고 있었다. 반면 최민정은 1000m와 3000m 계주에서 슐팅에 금메달을 내주고 은메달만 2개를 얻었다. 쇼트트랙 마지막 경기인 1500m에서도 1위를 하지 못한다면 평창 2관왕(3000m 계주)이 '노 골드'에 그칠 위기였다.

1500m 2연패를 향한 최민정의 의지는 뜨거웠다. 이미 최민정은 준결승 3조에서 경이적인 아웃코스 질주로 2분16초831의 올림픽 기록을 세웠다. 2016년 자신이 세운 세계 기록(2분14초354)까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1500m 왕좌였다.

결승 레이스 초반 탐색전에서 최민정은 1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11바퀴를 남기고 한위퉁(중국)이 갑자기 선두로 치고 나가는 변수가 발생했다. 이에 슐팅이 다급히 뒤쫓았고 나머지 선수들도 뒤를 따랐다. 한위퉁은 초반 오버 페이스로 금세 추격을 허용했다.

이때 최민정이 승부수를 걸었다. 8바퀴를 남기고 특유의 아웃코스 공략으로 단숨에 1위로 올라섰다. 이후 속도를 높이며 경쟁자들의 추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폰타나와 슐팅이 추월을 노렸지만 최민정이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 두 손을 번쩍 들며 금메달 미소를 지었다.

'이겼다' 최민정이 16일 중국 베이징 캐피털 인도어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500m 경기에서 폰타나(왼쪽), 슐팅을 제치고 1위로 골인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

그런 최민정의 뒤에서는 장거리까지 제패하려던 슐팅의 야심이 좌절된 사건이 벌어졌다. 3바퀴를 남기고 스퍼트를 하던 3위 슐팅이 앞서 달리던 한위팅과 충돌하며 바깥으로 밀려난 것. 넘어질 만큼의 충격은 아니었지만 한위퉁의 팔에 밀린 슐팅은 인코스에서 벗어나 순간 속도가 죽었다.

그 사이 폰타나가 2위로 올라섰고, 최민정은 더 앞으로 달아났다. 슐팅은 곧바로 인코스를 파고들어 한위퉁을 제쳤지만 폰타나와 최민정까지 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0.003초 차로 폰타나에게 은메달을 내줬다.

경기 후 슐팅은 "오늘 컨디션이 좋아 1500m 챔피언을 예감했고, 3바퀴 남기고 모두 제칠 것이라 생각했다"면서 "그런데 중국 선수가 나를 밀어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고 돌아봤다. 이어 "내가 강하다고 느꼈기에 그 순간 정말 (마음이) 아팠다"면서 "(결과에) 감정적으로 조금 실망스럽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슐팅은 "그것도 경기의 일부이기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선의의 경쟁을 했던 선수들의 따뜻한 위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민정과 폰타나는 슐팅에게 다가와 격려해줬다. 슐팅을 안아준 폰타나는 경기 후 "슐팅은 금메달을 따려 했는데 부딪히는 불운이 왔다"면서 "슬프고 화가 나겠지만 아직 젊으니 또 대단한 일을 할 것"이라고 감쌌다.

슐팅은 "최민정과 폰타나가 다가와 '우리 모두 지난 올림픽 때 타이틀을 지켰다'고 말해줬다"면서 "정말 특별한 일"이라고 경기 후의 대화를 들려줬다. 이어 "최민정과 제대로 붙고 싶었지만 오늘 (최민정이) 정말 강했다"고 승복했다.

폰타나 역시 "최민정이 금메달을 따내 기쁘고 결승 결과도 만족한다"고 축하했다. 단거리, 중거리 여왕이 인정한 장거리 여왕인 셈이다. 최민정도 "두 선수와 '평창 때와 결과가 같다'는 얘기를 했다"면서 "정말 좋은 선수들과 선의의 경쟁을 4년 동안 펼치며 발전하는 게 너무 좋다"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위로와 축하' 16일 중국 베이징 캐피털 실내 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500m 결승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최민정(오른쪽부터)이 동메달을 획득한 슐팅, 은메달리스트 폰타나와 서로 격려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3명의 여왕은 모두 스포츠 역사를 쓰고 있다. 최민정은 역대 한국 선수 동계올림픽 최다 메달 타이(5개) 기록을 세웠다. 슐팅도 단일 대회 4개의 메달을 따낸 2번째 네덜란드 빙상 선수가 됐다.

특히 폰타나는 15살 10개월의 나이에 2006년 토리노 대회에서 이탈리아 역대 최연소 동계올림픽 메달 기록을 쓴 데 이어 이날 통산 11번째 메달을 따내며 역대 이탈리아 동계올림픽 최다 기록을 세웠다. 이미 혼성 계주 2000m 은메달로 9번째 메달을 걸며 8개의 안현수(러시아명 빅토르 안)와 아폴로 안톤 오노(미국)의 역대 쇼트트랙 올림픽 최다 메달 신기록을 썼다.

그렇다면 차기 동계올림픽인 2026년 밀라노 대회에는 어떻게 될까. 3명의 여왕이 같은 종목 3연패를 이룬다면 스포츠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 될 터. 최민정이 메달 1개를 따면 하계올림픽까지 통틀어 최다 메달 타이, 2개를 따내면 새 역사를 쓴다. 4년 뒤면 최민정은 28살, 슐팅은 29살이 된다.

이에 최민정은 일단 "평창올림픽 준비 할 때도 베이징은 생각을 못했듯 베이징 대회 준비할 때도 밀라노는 생각을 못 했다"면서도 "음… 그 부분은 쉬면서 좀 천천히 생각해봐야겠다"고 말했다. 4년 뒤면 36세가 될 폰타나는 이번 대회 뒤 은퇴를 시사했지만 이날 "3명 선수가 2026년 다시 시상대에 설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에 "대단한 꿈인 동시에 지금은 그저 꿈일 뿐이지만 실현될지 지켜보자"며 여지를 남겼다.

두 번의 올림픽에서 모두 금빛 질주를 펼쳤던 3명의 쇼트트랙 여제들. 우정 어린 절차탁마로 빙판은 물론 전 세계 스포츠를 아름답게 수놓은 이들의 질주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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