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B컷]멈추지 않는 대장동 공판에… 피고인들 "밥좀 먹고 합시다"

연합뉴스

한국인은 밥심이라고 합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고 합니다. 매주 나흘 저녁을 컵라면으로 때우는 가장(家長)이 있습니다. 기본권도 박탈당한 삶이라 짠하신가요? 그런데 근면성실한 시민의 안타까운 사연이 아니라 뇌물과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대장동 5인방(유동규 전 성남도공 기획본부장,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 남욱·정민용 변호사, 정영학 회계사)'의 사정이라면 어떨까요.

갈 길 먼 대장동 공판…컵라면으로 저녁 때우는 피고인들

일명 '대장동 5인방'에 대한 공판은 지난 8일 20회차를 맞았습니다. 피고인들에 대한 구속기한도 한달 내 만료됩니다. 이에 검찰은 유동규 전 성남도공 기획본부장에 대해 제3자에게 자신의 휴대전화를 없애라고 지시한 혐의를 추가했습니다. 변호인 측은 구속기한을 늘리기 위한 꼼수라며 반발하는 상황입니다.

재판부도 '1일 1증인신문'을 원칙으로 재판을 속도감있게 진행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법원 정기인사로 재판부가 바뀌면서 공판절차 갱신을 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변호인들이 방어권을 내세우면서 지난 공판 녹취록을 전부 재생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검찰도 지난달 25일 서증에서 진술조서를 포함한 증거 150건을 새로 쏟아냈습니다. 갈 길은 먼데 해야할 일은 오히려 더 늘어나는 양상입니다. 의무 규정은 아니지만 형사사건 특례법은 판결 선고를 공소 제기 6개월 이내에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만큼 서두르는 모습입니다.

이러다 보니 대장동 공판은 한번 개정했다 하면 오후 6시가 넘어 끝나기가 일쑤입니다. 가급적 '야밤재판'을 하지 않는 것이 트렌드로 자리잡은 최근 몇 년간의 서초동 양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연일 멈출 줄 모르는 공판이 이어지자 지난 4일 대장동 공판에서는 급기야 변호인들의 우려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유동규 전 성남도공 기획본부장. 경기도 제공

이날 18시 10분쯤 잠시 휴정을 했는데, 피고인 측 변호인들 사이에서 "이러면 밥 또 못먹는데", "우린 끝나고 먹으면 되지만 저기는(피고인들은) 그러질 못하니까"라는 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 이날은 이성문 전 화천대유 대표가 증인으로 출석한 중요한 공판이었습니다. 화천대유가 분담금은 적게 내고 이익금은 많이 챙겨간 사업 구조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증인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오후 7시가 지나서도 증인신문은 끝날 기미가 없어보였습니다. 하루 만에 증인신문을 끝내는 게 목표인 만큼 오후 8시, 9시까지 이어갈 태세였습니다.

결국 한 변호인이 "시간이 많이 늦어졌는데 법정에서 오후 7시까지 마치지 않으면 피고인들 식사가 불가하다"고 말했습니다. 뜻밖의 지적이 나오자 "그래서 (신문) 예정시간을 여쭤본 것"이라며 재판장도 다소 당황한 기색이었습니다. 검찰 측에선 재주신문(증인신청 한 당사자의 재신문)에 1시간 정도는 소요될 거라고 답했습니다. 재판장의 얼굴엔 당혹감이 번져갔습니다.

22.04.04 서울중앙지법 대장동 19차 공판
재판부 : (식사는) 기본적인 것에 해당해서 민감한 부분이긴 하죠.

변호인 : 일주일 세,네번 저녁식사를 못한다는 건 방어권을 뛰어넘는 기본권의 문제입니다.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는 것 같지만 저녁식사를 일주일에 네번이나 못하는 건… 심각하게 고려해 주십시오.

구치소에서 저녁식사 배식은 오후 5시 30분에 이뤄집니다. 통제가 기본인 구치소 특성상 이 시간을 놓치면 재소자가 별도로 식사하기가 당연히 어렵겠지요. 미리 피고인들 몫으로 배식을 받아놓고 공판이 끝난 뒤 돌아가서 먹는 것도 여의치 않다고 합니다. 피고인들은 고육지책으로 컵라면을 얻어먹는다고 하는데, 오후 7시까지는 재판을 끝내야 뜨거운 물이라도 끓여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너무 늦으면 이마저도 어렵다는 겁니다.

일부 피고인의 경우 대장동 공판뿐만이 아니라 곽상도 전 국민의힘 의원의 아들에게 '50억 퇴직금'을 준 사건 등 다른 별건 재판에도 출석하고 있습니다. 별건까지 보태면 일주일에 네 번 공판에 출석하는 상황입니다. (주 4번 굶다시피 한다는 말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수천억대 권력형 사기 사건에 분노한 시민들이 이런 광경을 직접 본다면 그깟 저녁 한 끼 굶는 것쯤이야 무슨 대수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저녁식사는 마땅히 지켜줘야 할 기본권이라는 것에 변호인들은 물론 재판장과 검찰도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때 맞춰 밥을 먹을 수 있는 권리는 인권적 측면에서 생각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피고인 사정에 무심한 재판부?

앞서 설명해드린 것 같이 재판장이 당황해 했던 이유는 진심으로(!) 피고인들이 늦게라도 끼니를 챙기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준철 부장판사가 변호인들에게 그간 끼니 해결을 어떻게 해왔는지 자세히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22.04.04 서울중앙지법 대장동 19차 공판

재판부 : 종전에도 못했나요? 식사 어떻게 하세요?

변호인 : 컵라면을 얻어먹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재판하는 날은 식사 잘 못하고 있습니다.

재판부 : 네, 그래요. 7시까지 끝내면 식사한다고 들었는데…

변호인 : 7시쯤 가면 컵라면에 물을 끓여줄 수 있습니다. (그 시간을) 넘어가면 그것도 어렵습니다.

재판부 : 그런 사정이 있는지 몰랐네요. 7시까지 끝내면 식사는 제대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변호인들은 "법대 위에선 아랫동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른다"는 자조 섞인 농담들을 하는데, 이번엔 유독 맞아떨어진 상황이 됐습니다. 심야재판이 비일비재했던 몇 년 전엔, 속기사가 너무 지친 나머지 무단이탈을 했는데 재판장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재판을 진행하다가 배석판사가 일러주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솔직히 심야재판이라도 강행하고 싶은 것이 일선 재판장들의 속마음이라는 귀띔도 합니다. 주요 공판의 경우 판결이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여론의 비판은 물론이고 법원장이 눈치를 주거나 일처리가 느리다고 낙인 찍히기 십상이라는 설명입니다. 하물며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된 대장동 공판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조금이라도 재판이 지연되면 변호인들의 '시간 끌기' 전략에 재판부가 넘어갔다는 비판이 나오기 십상이니 재판부가 일사천리로 재판을 진행하려 애쓰는 심정도 이해 못 할 바가 아닙니다. 재판부와 각세우길 꺼려하는 변호인들 입장에서도 '밥은 먹게 해 달라'는 말 한마디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변호인은 CBS노컷뉴스에 "피고인들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다 보니, 기본적인 걸 지켜달라고 목소리를 높이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습니다.

정민용 변호사가 지난달 1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대장동 개발 로비·특혜 의혹 사건 1심 속행 공판에 출석하며 법정으로 향하는 모습. 연합뉴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사법부에서 '인간의 기본적 권리'는 무엇보다 중요시 돼야 합니다. 물론 속된 말로 '대장동 5인방'이 예뻐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파렴치한 죄인임이 분명하다 해도 법정에서 이들에게 행해지는 비인권적 조치는 '선례'로 남아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판부가 피고인들이 식사를 못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재판을 강행하지야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상당수 비인권적 행위라는 것이 의도치 않은 상황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것이라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한 국가가 높은 인권수준을 갖춘다는 것이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국민적 공분을 산 '대장동 5인방'이어도, 인권 사각지대에 있는 사회적 약자여도 배고픔의 고통은 겪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 기본권의 정신입니다. '한 사람의 권리가 위협받을 때 모든 사람의 권리가 감소한다'는 법조계의 명언을 곱씹어 보게 만드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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