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여의도에서 눈치 빠른 국회의원, 보좌진, 당직자, 기자들은 국회법 책자를 펴들고 있습니다. 정치권에 대화나 타협 같은 '규범'이 실종되고 대립과 반목이 피어날 때 으레 시작되는 '룰 싸움'을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일명 '검수완박' 논의가 최근 국회를 격랑 속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죠. 대선 패배로 시름하던 민주당이 이 법안 처리에 '직진'하고, 국민의힘과 검찰이 거세게 저항하면서 파열음이 커졌습니다.
민주당은 검찰에 남아 있는 '6대 수사'를 삭제하는 방안을 의원총회에서 당론으로 채택한 뒤, 준비하던 검찰청법, 형사소송법 수정안을 최종 대안으로 다듬고 있습니다. 닷새간의 숙려기간,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치면 다음 주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될 전망입니다.
당장 국민의힘은 필리버스터에 돌입할 태세입니다. 무제한 토론을 통해 본회의 의사 진행을 합법적으로 막는 수단이죠. 원내지도부 쪽에 물어보니까, 이미 구체적으로 작전을 짜고 있는 단계라고 합니다.
여기서 궁금한 게 민주당의 전략이죠. 민주당은 플랜A, 플랜B, 플랜C, 이렇게 단계별로 대응할 계획입니다. 이건 아무래도 상대가 있는 싸움이다 보니 취재가 쉽진 않았는데 지금까지 파악한 것만 좀 정리해드릴게요.
먼저 민주당의 플랜A는 필리버스터를 압도적 다수결로 종결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국회법상 재적의원 5분의 3, 즉 180명이 동의하면 필리버스터도 도중에 그냥 끝내버릴 수가 있거든요.
지금 민주당의 의석이 172석이죠. 여기에 무소속 의원 중 민주당 성향 6명, 민주당이랑 비례 위성정당 단계에서 한 몸이었던 기본소득당, 시대전환 소속 의원을 1명씩 더하면 딱 180명이 됩니다.
다만 이 가운데 구속 수감 중인 의원이 1명 있고요. 혹시 코로나19 자가격리로 누군가 못 나오게 되거나 혹여 이탈표가 '하나라도' 나오면 금세 어그러질 수 있습니다. 3년 전 공수처 설치법 처리할 때도 민주당 의원 중에서 당론과 달리 기권한 뒤 "화장실 다녀왔다"고 너스레 떤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지금 민주당은 정의당을 끌어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의당 소속 의원 6명만 같이 손 들어주면, 국민의힘 필리버스터를 무난하게 끝낼 수 있을 테니까요.
이렇게 되면 또 궁금해지는 게 정의당의 입장이겠죠. 예상하시겠지만 정의당은 고심에 들어갔습니다. 13일 저녁에 의원단, 대표단이 긴급회의를 열어 논의했지만 필리버스터 참석 여부에 관해서는 가타부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전에 정의당은 민주당이 추진하는 검수완박 법안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습니다. "시기도 방식도 내용도 동의하기 어렵다"라는 강한 반박이, 민주당 의원총회가 있기 전인 지난 11일 여영국 대표 입에서 나왔습니다.
다만 최근 윤석열 당선인이 한동훈 검사장을 법무부장관에 지명한 걸 명분 삼아 정의당 입장이 바뀔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정의당의 고민은 이런 내용적인 측면보다는 '어느 쪽 편에 손을 들어주냐' 하는 부분에 있습니다. "내편 네편이 중요한 상황이 돼 버리지 않았냐" 당 핵심 관계자의 말입니다.
실제로 정의당 내부에서 여론이 엇갈립니다. 일단 당의 기반이 취약하니까 '현실적으로 민주당이랑 손잡아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의견이 한쪽에 있고요. 반면 과거 숙원이었던 연동형 비례대표제 추진 과정에서 위성정당 설립으로 배신을 당했던 걸 기억하는 '불신파'가 한쪽에 있습니다.
어쨌든 민주당은 정의당이 필요로 하는, 약한 고리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4년 전 전국 기초의회 중 42곳을, 원래는 '4인 지역구'인데 여야 합의로 '2인 지역구'로 찢어놨었거든요. 이걸 다시 4인으로 회복하는 방안을 거론하며 설득을 시도하고 있답니다. 이건 광역의회 입법 사안이라 국회에서 반대해도 뚫을 수 있다더라고요.
물론 민주당이 아무리 꼬셔도, 정의당이 민주당 편에 서주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필리버스터를 막을 수 없겠죠. 그러면 민주당은 바로 플랜B에 돌입합니다. 회기 쪼개기, 살라미 전술이라고 보통 말하는 방식인데요.
국회법상 국회 회기가 종료되면 진행 중인 필리버스터는 같이 끝납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회기에서 자동으로, 제일 처음에 상정됩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회기를 하루만 잡고, 사흘 뒤에 또 하루 잡고, 이런 방식으로 끊어서 잡으면 필리버스터 효과를 무력화할 수 있는 거죠.
게다가 지금 논의 중인 검수완박 법안은 검찰청법이랑 형사소송법 등 딱 2건이어서, 일주일이면 다 처리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5월 3일까지 본회의 통과, 그 뒤에 국무회의 의결을 고려하더라도 윤석열 정부 취임(5월 10일) 전까지 입법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남은 변수는 뭐가 있을까요? 먼저는 박병석 국회의장입니다. 4월 임시국회를 며칠부터 며칠까지 할지, 여야 합의가 아직 안 돼 있는 상태거든요. 만약 국민의힘이 일정을 합의해주지 않으면 민주당 요청으로 의장이 직권으로 회기를 잡아야 합니다. 근데 그렇게 되면 '의장이 한쪽 편에 섰다' '편파적이다' 하는 비판이 바로 나오게 되거든요.
박병석 의장은 보통 이런 비판을 최대한 피해 가려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언론중재법 때도 민주당에 제동을 걸었다가 김승원 의원에게 'GSGG'라는 황당한 욕설까지 들었던 거거든요.
반대로 의장이 받아주면 쪼개기 전술이 가능하겠죠. 국민의힘에선 이걸 뚫어낼 방법이 있을지 한창 연구하는 중입니다. 어떤 대안이 나올 지는 앞으로 더 지켜봐야겠습니다.
다만 최근 들었던 솔루션 중에 실현 가능성은 떨어지지만 좀 신박하고 재밌는 게 하나 있어서 슬쩍 소개해드립니다. 의사처리 지연전술로 일본에서 썼던 사례라는데요. '우보(소걸음)'라는 수단입니다.
우리 국회에서 법안 처리는 보통 앉은 자리에서 '기명 전자 투표'를 하게 됩니다. 이걸 재석 의원 5분의 1 요구로 '무기명 투표'로 바꾸면 한명씩 앞에 나가서 투표지에 직접 투표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표소로 갈 때 엄청 천천히 걸어 나가면, 소처럼 천천히 걸어가면 필리버스터랑 시간을 끌 수 있겠죠. 그렇게 하지 말라는 금지조항이 있는 게 아니니까, 아예 불가능한 대안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180석 민주당을 국민의힘이 막아내기는 어려울 거라는 게 중론입니다. 맨 마지막에 문재인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면요. 그래서 국민의힘도 이렇게 여론전에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