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1년 연극 '한여름밤의 꿈'으로 연기를 시작한 이정은은 2000년 영화 '불후의 명작'을 통해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후 무대와 스크린, 브라운관까지 넘나들며 자신만의 연기를 선보여 온 이정은은 2019년 드라마 '눈이 부시게' '동백꽃 필 무렵'에서 존재감을 제대로 드러냈다.
그리고 영화 '기생충'을 통해 이정은은 다수의 상을 안으며 '이정은'이란 어떤 배우인가 새삼스레 입증하며 세계적인 배우로 발돋움했다. 3년 후인 2022년, 이정은은 첫 단독 장편 주연작 '오마주'를 통해 그동안 보여주지 못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냈다.
'오마주'는 한국 1세대 여성 영화감독의 작품 필름을 복원하게 된 중년 여성 감독의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시네마 여행을 그리는 영화다. 이정은은 중년 여성 감독 지완 역을 맡아 1962년과 2022년을 잇는 위트 있고 판타스틱한 여정을 보여준다.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현실의 이정은 역시 재치 넘치는 그만의 화법으로 '오마주'와 지완에 관해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정은, 생애 첫 단독 주연을 맡다
▷ '오마주' 시나리오를 처음 받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합니다.
20분 만에 다시 전화 드려서 하겠다고 했어요. 쑥 한 번에 다 읽혔고, 감독이란 사람이 멀지 않게 느껴지는 거예요.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감독님을 빨리 뵙고 싶었어요. 어떤 결의 분일까, 뭘 생각하고 있을까, 영화에 대해 어떤 생각 혹은 실패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그런 게 궁금해서 빨리 뵙고 싶었어요.
▷ 그렇게 뵙고 싶던 감독님을 실제 만나니 어떠셨어요?
맨 처음 봤을 때 되게 차갑다고 생각했어요. 이거 주연한다고 덥석 잡았는데 계속 시달리는 거 아닐까?(웃음) 그런데 안이 너무너무 소녀 같고 따뜻하셨어요. 지금은 그냥 인간적으로 더 많이 친해진 거 같아요. 그리고 소원이 생기더라고요. 우리가 어떤 시작이 되어서 '오마주' 다음에 의미도 있고, 경제적으로도 유익한 영화를 꼭 찍으시면 좋겠다고 말이죠. 영화제에서만 유명한 감독님인 것처럼 느껴지는데, 전 사실 재밌게 쓰는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앞으로 좋은 글과 좋은 작품이 더 나올 거라 생각해요.
▷ '오마주'가 첫 단독 주연작인데요. '단독 주연'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느껴지셨을까요?
찍고 있는 동안에는 사실 아무래도 저예산이다 보니 장편이라 생각 못하고 계속 찍었어요. 요즘에서야 좀 느끼는 거 같아요. 어쨌든 제가 참여한 작품에 대해 소개해야 하니까 좋은 영화였으면 좋겠다, 좋은 영향 미치는 영화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 같아요.
▷ 그렇다면 흥행에 대한 부담은 없으실까요?
사실은 제가 시나리오에 대해 매력을 느꼈던 건, 특정한 직업에 있는 사람이 갖고 있는 멋있음이 아니라 보편성이었어요. 내 나이 또래 여성들, 전문직을 갖고 있거나 주부로 살았어도 가족과 소통하지 못하는 게 있을 텐데 그런 보편성 때문에 이 작품 선택했어요.
개봉해봐야 알겠지만 그런 부분에서 공감하는 분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관객이 찾아오실까 두려움이 있죠. 얼마만큼 많은 관객이 극장을 찾아주실지, 이런 이야기에 공감하실지, 그런 게 좀 조심스러워요. 그런데 노력한 만큼 순리대로 될 거라 생각해요.
이정은이 '오마주'하는 배우 김영애
▷ '오마주'는 여성 영화감독 지완이 1세대 여성 감독 홍은원 감독의 영화 '여판사'를 복원하는 여정을 담아내고 있는데요. 찍으면서도 남달랐을 거 같습니다.
전 여성 감독님들이 몇 년도에 어떻게 활동하셨는지 구체적으로 몰랐어요. 아이를 둘러업고서라도 영화를 찍고 싶어 하는 열정이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저도 집안일에 묶여 있으면 그렇게 할 엄두가 안 날 텐데, 얼마나 좋아하고 거기에 모든 걸 걸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사실 당시는 척박했고, 여자 감독이 나오기도 힘들었잖아요. 지금도 영화 속 지완도 세 번째 영화를 찍은 후 고비를 맞고 있고요. 홍은원 감독도 세 번째 영화 이후로 영화를 못 찍어서 그 둘이 닮아 있는 모습을 보며 생각을 많이 했어요.
▷ '오마주'를 통해 지완으로 살고 지완으로 이야기하며 지완으로 느끼고 경험하며 알게 된 지완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저는 밖으로 불만 요소나 이런 걸 잘 표현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지완은 안에서 흐르고 있는 파장은 엄청나게 큰데, 겉으로는 고요한 거 같아요. 어떤 고요함 속에 파장이 느껴지는 인물인 거 같아요. 내지를 수도 없고, 그걸 멈출 수도 없는 상태에서 고민을 계속하면서 자기의 열정을 쏟을 일을 계속 찾아요.
그래서 아마 실제로 감독님도 '여자만세'라는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여성 감독들의 뒤를 추적하는 내용을 만드셨을 거 같아요. 그런 열정을 풀어버리면 사실 시원하거든요. 그 응축된 감정을 갖고 어떤 걸 지향해서 나간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힘이 되더라고요. 그런 부분에서 지완도, 감독님도 영화를 계속 만들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극 중 지완과 다르게 감독님은 7편의 작품을 만드셨다고 들었어요.
전 돌아가신 김영애 선생님이 갖고 계시던 작품에 대한 열정을 좋아해요. '오마주'에서 편집기사님이 지완에게 끝까지 하라고 한 것처럼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던 건 영애 선생님이 처음이었어요. 그분의 말씀대로 지금도 배우를 하고 있어요.
▷ 예비 관객들에게 '오마주'는 이런 영화라고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한 번에 두 가지 영화를 볼 수 있어요. 대단한 영웅은 나오지 않지만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 있으니 보러 와주시면 보편적인 정서를 같이 나눌 수 있어요. '아! 우리의 영화 역사 속에서 이런 감독들이 있었다'라면서 새삼스러운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극장에 대한 그리움도 있어요.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에 관해서 부담 없이, 편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가 좋더라고요. 오래된 낡은 영사기가 돌아가는 소리에 대한 향수도 느낄 수 있으니 좋지 않을까요.(웃음)
<하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