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삶을 결정하는데? 난 나야![책볼래]

우리학교 제공

결정 거부자


작가에 대한 출판사의 설명은 '고전을 공부하는 소설가'다. 우리 고전을 탐구하고 역사 속 인물의 삶에 상상력을 보태어 생동하는 소설을 쓴다.

작가 설흔은 주요 작품에서 고전과 현대 소설, 인문학, 청소년 문학을 넘나들며 다양한 소재의 글을 쓴이다. 세종, 박지원, 이황, 박제가, 김정호 등 역사적 인물을 배경으로 의문의 사건을 풀어가거나 울타리를 넘어 도전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읽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는다.

그런 그가 '결정 거부자'를 통해 우리에게 흥미로운 두 세계관을 소개한다.

태어난 아이들은 쭉 미결정자로 살다가 열다섯 생일에서야 부모의 재산과 기초 학교 성적을 바탕으로 성별과 직업, 외모, 인간관계까지 모든 것이 결정된다. 이 세상에서는 이제 막 청소년이 된 아이들은 돈, 권력, 사회적 영향력까지 모든 것을 가진 존재 여성성 '히나'와 세상의 밑바닥에서 멸시받으며 근근이 살아가는 남성성 '브로글'로 나뉜다.

특이한 것은 남성인 아빠가 양육하고 여성인 엄마가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며 일처다부제가 허용되는 모계 중심의 사회라는 점이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불평등한 세상에 더해, 저자는 성별까지 선택되는 세상을 그린다. 부모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라도 부유한 미래가 보장된 특권층 '히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실패한 어른들은 포기자가 되거나 도망자가 되어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한다.

브로글이 되면 올라갈 수 있는 사회적 지위는 한정된다. 그렇다보니 돈 많은 히나의 돈을 노리는 세컨드나 서드가 되어 유산을 노리는게 목적이 되는 경우도 있다.

'루저' 인생이 뻔한 브로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두가 애쓰지만 성적도 별로고 특별히 하고 싶은 것도 없는 미결정 존재 '나'는 아빠의 극성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래 전 죽은 엄마의 친구가 갑자기 나타나며 사건들이 벌어진다. 출생의 비밀과 부모의 과거사 등 아직 정체성이 불안한 아이들에게 다가오는 힘든 여정이다.

혹독한 이 세계에서도 정해진 답처럼 살기를 거부하며 새로운 미래를 결심하는 아이들이 자라난다. 도망치지 않고 '살아 있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는 열다섯 아이들의 이 성장소설은 기꺼이 '경계'를 넘어서는 선택을 응원한다.

1990년대 등장한 새로운 세대들은 주어진 선택의 길을 걷도록 했던 세상의 가치를 바꾸려고 했다.

가수 김진표의 노래 '내 낡은 서랍속의 바다'를 배경으로 내레이션이 흐른다.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어 / 난 세상과 타협하고싶지 않아 /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 화장하지 않는 내 모습으로 살고 싶다 / 우습지 않니 /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거 / 내 인생은 내 스타일대로 살겠어 / 난 나야!"

지금의 밀레니얼세대인 1998년 X세대를 겨냥한 '리바이스'의 광고 '난 나야!' 시리즈 카피다.

또 다른 시리즈에서는 "…내기할까? / 세상이 나를 바꿀지 / 내가 세상을 바꿀지 / 난 나야!"라며 더 도전적이다.

주인공 '나'도 마찬가지다.

엄혹한 현실에서 자라나는 아이들 중 누군가는 현실 사회가 만들어낸 성공을 향해서, 누군가는 부모의 등쌀에 떠밀려서, 누군가는 열악한 환경에 낙오될 수밖에 없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은 1990년대나 2020년대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계급사회가 인간이 인간을 가장 쉽게 통제하기 위한 역사적으로 오래된 수단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계급 상승을 위한 치열한 투쟁거리를 남겨두는 사회적·제도적 시스템이 인간을 어린 시절부터 경쟁에 내모는 사회 구조를 바꾸는 것, 그것은 늘 새로운 세대의 몫이었으며, 거센 저항을 뚫고 나아갈 때 우리는 이를 '진보'라고 했다.    

"돈과 머리로 잔인하게 등급을 나누는 이 차별과 통제의 나라에 내가 말하는 배려가 끼어들 자리가 있기는 하냐? 말로만 자유, 말로만 평등, 얘와 우리가 같은 미결정 존재라니 하늘이 웃고 땅이 웃겠다." 

역설적으로 책의 등장 인물과 세계관을 비틀어보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낼 정도다. 그래서 저자의 독특한 세계관이 다소 불편하고 억지스러운가 싶기도 하다가 '너무 현실적이잖아' 하게 된다.

책은 '레드 스테이지'와 '블루 스테이지' 두 개의 이야기를 교차시키며 진도를 나가지만, 각기 다른 세계관(멀티버스)으로 펼쳐지는 두 이야기는 각 스테이지 서사의 종착지에 가서야 저자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작은 반전도 기대해 봄 직하다.

SF 영화에서 한 번쯤 보았음 직한 불평등 세계관. 먼 미래에 선택받은 이들의 비정상적인 삶, 그마저 빼앗긴 이들의 저항을 통해 불평등은 무너진다. 이처럼 서구화된 우리 사회와 한국적(전통적) 사고의 현실을 마주하는 딜레마 서사에 SF적 비현실이 비집고 들어가 아이들의 미래를 보는 일은 말 그대로 극적이다.  

우울하고 갈등 요소가 많은 것이 전반부라면 후반부는 희망과 꿈이 가득한 미래로 향하는 두 명의 '나'를 만나게 된다.

설흔 지음ㅣ우리학교ㅣ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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