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컷 인터뷰]"A대표팀 실패, 제겐 보약 같은 시간"…울산 홍명보 감독의 회상

'의리 축구·B급 선수 발언' 홍명보에게 첫 실패 안긴 A대표팀
한국 축구 레전드, 홍명보 감독과 90분 대화②

2002 한일월드컵 당시 홍명보 감독(20번). 울산 현대 제공

"사람들이 저를 향해 '너는 실패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감독.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1년 1개월의 시간은 선수와 감독 시절을 포함한 약 20년의 축구 커리어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울산 현대 홍명보(54) 감독은 대학 졸업 후 병역 의무까지 끝내고 프로에 데뷔해 해외 무대까지 진출했다. 태극마크를 달고 연령별 국가 대표, 2022 한일월드컵 4강까지 다른 선수가 이루지 못한 결과를 거머쥐었다.
   
지도자 삶도 순항했다. 2005년 A대표팀 수석 코치를 시작으로 지도자의 길에 들어선 홍 감독은 2009년 20세 이하(U-20) 대표팀 사령탑에 부임, 첫 감독직 행보에 나섰다. 이어 2009 국제축구연맹(FIFA) U-20 월드컵에서 8강에 진출했다.

홍 감독은 곧바로 2012 런던 대회를 준비하는 올림픽 대표팀의 사령탑으로 부임해 4강 진출 신화를 완성했다. 특히 일본과 3·4위전에서 박주영(현 울산·당시 아스널)과 구자철(현 제주 유나이티드·당시 아우크스부르크)을 앞세워 2 대 0으로 이기고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축구 최초 올림픽 메달이었다.
   
나락의 시작이자 끝은 A대표팀 감독 부임이었다. 2014 브라질월드컵을 앞두고 예선을 치른 것은 최강희(현 산둥 타이산) 감독이었다. 하지만 최 감독은 '월드컵 본선 때는 감독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고 약속대로 본선 진출을 확정한 뒤 원소속팀 전북 현대로 돌아갔다.

월드컵을 1년 앞두고 닥친 감독 공백. 대안이 없던 대한축구협회는 홍 감독을 지목했고 우여곡절 끝에 2013년 6월 사령탑을 수락했다.
   
■ '의리 축구'와 'B급 선수 발언' 꼬리표
   
2013년 6월 한국 축구 대표팀 감독에 부임한 뒤 기자회견을 하는 홍명보 감독. 울산 현대 제

A매치 휴식기를 맞아 지난 16일 울산 현대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홍 감독은 당시 감독직 수락 상황에 대해 "그때는 어떻게 보면 제가 A대표팀 감독으로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물론 그 상황에서도 안 할 수도 있었다. 근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실패가 보였지만 그것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한국 축구계에서 많은 혜택을 받은 만큼 이것을 돌려주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
   
현실은 심각했다. 보이지 않는 국내파와 해외파 선수들의 차별, 여기에 2012 올림픽 대표팀을 함께한 선수와 그러지 못한 선수의 파벌까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대표팀 상황은 곪아있었다.

예선을 이끈 감독마저 떠났고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다. 짧은 시간 안에 팀을 꾸려야 했다. 홍 감독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올림픽 대표팀 시절부터 지켜봤던 선수가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중 박주영은 홍 감독이 연령별 대표팀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지켜본 선수였다. 2012 런던올림픽에서 3위 달성을 이끈 주역이기도 했다. 2011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아스널에 입단한 박주영은 당시 왓퍼드 임대 중이었다. 아스널에서 기회를 잡지 못했고 왓퍼드에서도 별다른 활약이 없었다.

박주영은 경기 감각이 많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홍 감독은 박주영을 최종 엔트리에 올렸다. 소속팀에서 꾸준히 활약한 선수를 기용하겠다던 자신의 원칙과 어긋나는 선택. 지금까지 홍 감독을 따라다니는 '의리 축구' 꼬리표의 시작이었다.
   
결과적으로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한국 축구 대표팀은 역대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다. 비교적 수월할 것으로 예상됐던 H조에서 1무 2패에 그쳤고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인천국제공항으로 귀국하는 선수단엔 엿이 날아들었다.
   
새벽 인청공항을 통해 귀국한 뒤 기념 촬영을 준비하던 축구 대표팀 앞으로 한 인터넷 커뮤니티 회원들이 투척한 엿이 날아들고 있다. 박종민 기자

홍 감독의 리더십은 비판의 대상이 됐다. 한국 축구계의 레전드로 불리던 홍 감독은 월드컵이 끝난 뒤 7월 사령탑에서 물러났다. 부임 후 약 1년 1개월. 당시 홍 감독은 사퇴 기자회견 중 선수 등급 발언으로 마지막까지 홍역을 치렀다. A대표팀 감독은 커리어의 첫 실패이자 대실패로 끝났다.
   
사람들은 홍 감독을 비난했다. 무시하는 사람도 생겼다. 예전이면 인사를 나눴을 사람도 홍 감독을 보자 시선을 피했다. 그는 "사람들이 저를 향해 '너는 실패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는 것이 느껴졌다"면서 당시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홍 감독은 "지금 생각해 보면 월드컵이 끝나고 다른 사람이 보기엔 굉장히 힘든 시간이었다고 보지만 저는 나름대로 꽤 좋았던 시간이었다"고 평가했다.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는 것. 그는 "그 시간을 빼면 저한테는 선수 때부터 전부 다 성공한 시간밖에 없었다"며 "힘든 시기에 여러 가지 것을 배울 수 있어서 참 좋았다"고 덧붙였다.
   
꼬리표처럼 따라 다니는 의리 축구에 대해서는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주영이 경기를 뛰지 못했지만 2014년 3월 그리스와 평가전에서 골을 터뜨린 것과 해당 포지션에 박주영만 한 선수가 없었다는 점을 짚었다.
   
2012년 6월 올림픽대표팀 감독 시절 홍명보 감독과 박주영. 울산 현대 제공

선수 등급 발언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선수가 잘해서 유럽에 나가면 B급 선수가 된다고 이야기했다"며 "해외에 나가서 경기를 뛰지 못하면 실력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의도였다"고 해명했다. 이때 K리그에서 경기를 계속 뛰는 선수와 비교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고민이었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제는 현장을 경험한 K리그 감독이다. 그때와 K리그를 바라보는 시선도, 경험도 달라졌다. 홍 감독은 "그때 팬들이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에 대해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면서 K리그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을 재차 밝혔다. 그는 "그 시간은 지도자로서 노하우가 부족했던 시기였다"며 "실패를 경험한 이후의 시간이 큰 보약이었다"고 회상했다.
   
■ 대표팀 호출과 선수 부상, 그리고 주민규
   
이번 6월 A매치 기간에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은 울산에서 4명의 선수를 차출했다. 항저우아시안게임을 준비하는 황선홍 감독도 2명의 선수를 뽑아갔다. 주축 선수 6명이 빠진 울산은 온전한 전력이 아니다.
   
중국과 1차 평가전을 치르던 황선홍호에서 부상 소식이 날아왔다. 울산의 오른쪽 윙어 엄원상이 경기 중 오른발 인대 부상을 당해 조기 귀국했다. 리그 재개를 준비하던 홍 감독으로서도 난감한 상황.
   
그는 "제일 곤란한 게 이런 경우다. A매치 기간 선수들이 나가서 부상을 당해 들어오는 것인데 이 점이 제일 난감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상 완벽한 더블 스쿼드가 아니면 주전 선수를 대체할 만한 선수가 없어서 팀 구성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토로했다.
   
불행 중 다행은 유럽 무대로 진출했던 이동경이 임대를 마치고 지난 15일 팀으로 돌아왔다. 홍 감독은 "지금 훈련에 합류했고 몸 상태는 더 지켜봐야 한다"며 "부상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똑같은 포지션은 아니지만 빨리 경기 감각을 끌어올려 엄원상의 빈자리를 메워주길 기대했다.
 
울산 현대 최전방 공격수 주민규. 울산 현대 제공

울산에는 대표팀 소집 관련해 뜨거운 선수가 또 한 명 있다. 바로 최전방 공격수 주민규다. 2021시즌 22골을 기록한 득점왕. 2022시즌은 경기 출전 기록에서 밀려 조규성(전북·17골)에게 득점왕 내줬지만 득점은 17골로 같다.

K리그 통산 307경기 출전 127골 34도움. 그러나 주민규의 이력엔 태극마크가 없다. 2013년 프로 데뷔했지만 A대표팀에는 단 한 차례도 호출되지 못했다. 2021년과 2022년 골 감각은 정점이었지만 전임 사령탑 파울루 벤투 감독은 주민규를 찾지 않았다.
   
이번 시즌 주민규는 K리그1에서 10골 1도움으로 득점 단독 선두를 달린다. 클린스만 감독이 부를 수도 있다는 기대감도 높아졌다. 3월 A매치는 2022 카타르월드컵 멤버가 주축이었던 만큼 6월 소집을 기대했다. 하지만 주민규는 클린스만 감독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이에 대해 홍 감독은 "감독의 선택이다"면서도 "한 번은 뽑아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한번 불러서 해보고, 아닌 것 같으면 쓰지 않으면 된다"며 주민규는 지금 대표팀의 공격수와 약간 다른 유형이라고 언급했다.
   
홍 감독도 제주 유나이티드 시절 주민규를 봤을 때는 움직임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직접 훈련을 시켜보니 활동량이 상당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클린스만 감독도 한번 직접 뽑아서 써보면 그런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울산 현대 홍명보 감독. 울산 현대 제공

울산은 오는 24일 대구FC와 홈 경기로 리그를 재개한다. 28일에는 제주와 FA컵 8강전도 앞두고 있다. 여러모로 중요한 여름이다.

홍 감독에게 의리 축구 이미지를 씌웠던 박주영은 이제 팀의 플레잉 코치로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됐다. 특히 박주영은 경기에 뛰지 않는 선수들을 두루 챙기며 울산이 하나가 되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 홍 감독은 천천히 자신에게 붙은 꼬리표를 떼고 있다. 아직 인종 차별 발언을 한 선수들의 징계가 남아있지만 이것 또한 반면교사가 됐다.
   
90분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진솔하게 이야기하던 홍 감독. 그는 "인생의 최고의 가치는 경험이다"면서 자신과 울산 선수들이 우승이라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앞으로 좋은 흐름을 이어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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