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 SF신작…외계 문어의 습격 "열받으니까 싸워야죠"

[신간]자전적 SF소설집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정보라 작가. 연합뉴스

'저주토끼'로 2023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의 연작소설집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가 출간됐다.

해양 외계 생물을 주제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낸 여섯 편의 SF 연작소설에서 정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문어같이 생긴 외계 생명체가 대학 강사들의 농성장에 등장해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며 빨판투성이 다리를 굼실거린다. 하지만 홀로 농성 천막을 지키고 있던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위원장이 휴대폰으로 문어 대가리를 가격해 쓰러트린 뒤 문어숙회를 해주겠다며 문어를 해체해버린다.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지만 정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가 녹아 있다. 그는 러시아문학을 전공하고 미국 예일과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뒤 러시아어와 문학을 가르치는 강사로 강단에 섰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시간강사 처우와 노동자로서의 열악한 환경에 분노해 투쟁 현장에 뛰어들었다.

첫 수록작 '문어'는 펜데믹 이후 대학에서 비정규직 강사들을 대량으로 해고한 사태를 배경으로 농성장을 홀로 지키던 노조위원장이 잠결에 거대 문어를 만나 라면에 넣어 끓여 먹으면서 일어나는 해프닝을 다룬다.

소설 곳곳에 웃음코드가 있지만 지극히 가벼이 넘길 주제는 아니다. 정 작가는 지난해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올라 미국 뉴욕 맨해튼으로 향하는 여정에 길거리에서 사탕을 팔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런 일들은 나를 화나게 만들고, 화가 날 때 글을 쓴다"라고 말했다. 시상식에서 그는 가자지구 학살 반대 성명을 낭독하는 자리에 함께했고, 폴란드 크라쿠프 중앙광장에서도 팔레스타인 내 집단 학살을 규탄하는 시위에 함께했다.

노동, 장애, 기후와 생태 등 인간 앞에 놓인 사회적 문제를 거친 문장으로 담아내 왔던 작가의 목소리는 이번 소설집에서도 이어진다. 눈여겨 볼 게 있다면 자신이 거리와 현장에서 경험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문어'에 등장하는 노조위원장(임순광 전 한국비정규교수노조 위원장)은 현재의 남편이다. 정 작가는 편집자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남편이 된 옛 위원장님하고 연애할 때 그가 바다생물을 멸종시킬 기세로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은 외계인이 쳐들어오더라도 문어 같이 생겼으면 그냥 먹어버릴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외계 문어를 먹는 이야기를 썼다"고 말했다.


래빗홀 제공

책은 '대게'와 '상어' '개복치' '해파리' '고래'와 같은 6편의 각종 해양생물을 소재로 이어진다. 시간강사 당사자로서 처우 개선을 위해 싸웠던 서울의 이야기에서부터 남편을 따라 그의 고향인 포항에서의 생활과 연대의 기록을 담아 지역적인 사건들로 구성되는 한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일본의 원전 폐수 방류까지 국제적인 문제에 관한 입장도 드러나 있다. 계획에 없던 전업작가로 살며 삶의 관점이 변해가는 과정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작가의 자전적 인물인 '나'와 그의 남편인 '위원장' 두 인물이 6편의 이야기를 끌어간다. 사회문제와 지구적 문제, 로맨스와 코미디가 SF장르에 버무려지며 의미를 찾으려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항복하면 죽으니까… 열받으니까 싸워야 한다'는 단순하지만 단단한 주제의식은 멈추지 않는다.

'정보라' 세 글자의 이름이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글 속에 살지 않고 실제 거리에 나가 땡볕과 추위, 억압을 견디며 목소리를 내 온 작가의 삶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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