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EN:]팔순 앞둔 '흰구름천사' 수녀의 명랑·담대 '인생예찬'

이해인 수녀 입회 60주년 기념 단상집 '소중한 보물들' 출간 기자간담회

이해인 수녀가 18일 단상집 '소중한 보물들'을 출간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활짝 웃고 있다. 김민수 기자
팔순을 내다보는 이해인(79) 수녀의 목소리는 또렷하고 명료했다. 특유의 밝은 웃음과 수줍은 농담이 더해지는 동안 예수를 닮은 이타적인 삶, 남들을 기쁘게 하는 삶에 대한 그의 소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18일 오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그의 수녀회 입회 60주년 기념 단상집 '소중한 보물들' 출간 기자간담회에 나타난 이해인 수녀는 삶에 대한 철학이나 신앙, 세상의 고민 해결 방법 같은 무거운 질문 대신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물어달라고 운을 띄웠다.

경쾌한 일탈을 꿈꾸는 앳된 소녀의 봉인된 감성을 드러내자 딱딱한 취재진들 사이에서도 웃음이 흘러나왔다.

"기쁨 발견 연구원인 내 취미는 참으로 풍성하다. '글로 말로 누구를 기쁘게 해줄까?'를 구체적으로 궁리하는 것. 좋은 시나 글귀를 모아 맛을 들이고 만나는 사람에 맞춰 나눠주는 것. 나뭇잎, 꽃잎, 돌멩이, 조가비, 빈 병, 솔방울, 손수건 등을 모아 예술성 있게 작은 선물을 만드는 것. 다양한 스티커를 이리저리 구성해 고운 카드를 만드는 것. 아름다운 풍경이나 마음 따뜻한 사람들의 말을 잊지 않고 적어두었다가 되새김하는 것…."

책 '소중한 보물들'은 이해인 수녀의 수녀회 입회 60주년을 기념해 그동안 기록해왔던 180권의 노트와 편지, 엽서, 가족과 같은 이들과 나눈 시에서 공개되지 않았던 '비밀서랍'의 글들을 추려 일상으로부터 감동받은 기쁨까지 자박자박 엮어냈다.

어머니의 깊은 신앙과 일찌감치 수녀회에 헌신한 언니의 영향으로 1964년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에 입회한 이해인 수녀가 지난 60년 동안 수도자로, 시인으로 살아오면서 경험한 수많은 인연과의 만남과 이별, 기쁨과 희망, 위로가 된 명인들의 글감과 사연도 풀어낸다.

직장암 수술을 받고 투병생활 중 금식이 풀린 어느 날 간병 수녀님이 첫날 포도알 하나, 이튿날엔 포도알 둘, 또 그다음 날 포도 세 알을 먹여줄 때 맛본 그 황홀감을 잊지 못해 쓴 시는 일상의 기쁨과 행복이 주는 소중함을 노래한다.

"많이 아파 병원에 오래 누워 / 지루하고 답답할 땐 / 딸기 한 개, 포도 한 알 /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기쁘다가 /누가 실제 들어와 먹어보라고 하면 / 얼마나 황홀하던지! / 웃고 또 웃다가 / 스스로 민망해 표정을 바꾸네" -217쪽 '딸기와 포도처럼' 중에서


김영사 제공


살아낸 날만큼 먼저 떠나보낸 이들을 떠올리며 '작은 죽음을 매일같이 연습한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엔 무겁기보다 활력이 넘친다.  

법정 스님과의 일화, 김수환 추기경의 서간문, 박완서 작가와의 인연 등 먼저 하늘로 떠난 이들과의 깊은 교감은 따뜻한 배려와 사랑, 그리움이 베어있다. 일상에서 만난 초등학생부터 노년의 어르신들까지 다양한 인연을 만들면서 매순간 치열하게 이들을 대하지 못했는 지에 대한 아쉬움은 매일처럼 만나는 사람을 위해 좋은 시나 글귀를 새긴 나뭇잎, 조가비, 솔방울 같은 작은 선물을 나눠준다. 팬들에게는 사인을 해주면서도 정성 들여 예쁜 스티커를 붙여주고 글귀를 적어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책은 일상의 작은 기쁨과 의미를 기록한 단상과 지인들과 나눈 편지글, 묵은 서랍에서 꺼낸 시, 2022년 11월부터 2024년 4월까지 이해인 수녀와 동행하며 찍은 사진들이 담겼다.

이해인 수녀가 18일 단상집 '소중한 보물들'을 출간하고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김민수 기자

▶ 이해인 수녀 질의응답
-이해인 수녀에게 보물이란?
= 수녀원이 있는 광안리 앞바다의 담백한 물빛색과 소나무다.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을 위해 모아둔 명언이나 좋은 글귀를 새긴 조가비, 솔방울에 달아 선물로 주는데, 받은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에 위로 되는 글들이 주어졌을 때의 기쁨과 즐거움. 삶의 시간이 주는 보물들이다.

-'희망의 아이콘'이라 불리는데, 이해인 수녀에게 희망이란?
= 아잔 브라흐마의 명상집 중에 '어둡다고 불평하는 것보다 촛불을 켜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 있다. 암투병을 하고 인간 관계에서 겪는 고통과 아픔도 있지만 수도자로 이러한 것을 참는 것이 아까워 나는 도리어 축복의 기회로 삼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나 희망이 될 수 있도록 하려 한다. 힘들어도 눈물 흘려도 절망에서 태어난 희망이라는 게 있다. '신발 하나를 신어도 희망을 신는다'는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수도자, 수녀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 예전엔 여리고 가녀린 감수성 A형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담대하고 명랑한 것 같다. 수녀를 안 했다면 방송국 PD나 연극 기획자를 했어도 잘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아플 때일수록 자기 중심적이기보다 자기 객관화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더 명랑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필 '12월의 편지'에서 '명랑투병 4대 원칙'이 나온다. '신발 하나를 신어도 희망을 신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젊은 친구들에게 한 말씀?
= 실제 '명랑투병 4대 원칙'을 따로 적어서 만들어두신 경우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많이 회자가 됐는데, '1. 뭔가 달라고 청하기보다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하는 기도를 올린다 / 2. 늘 당연학 받아들이던 것도 기적처럼 놀라워하며 감탄한다 / 3. 실수나 약점을 부끄러워하고 숨기기보다 솔직하게 인정함으로써 마음의 여유를 찾는다 / 4. 속상하고 화나는 일을 만나도 흥분하기보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며 어질고 순한 마음을 지닌다' 이다. 저를 찾아오는 젊은 친구들이 외모나 어떤 시련으로 고통과 아픔을 이야기하며 자살한 경험도 이야기 하는 경우가 있는데, 어떤 말로 위로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대 졸업 연설 말미에 "매일 그것이 당신 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여기며 산다면, 언젠가는 확실히 당신이 옳았음이 드러날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항상 삶이 끝이 있고 여러분도 죽음을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매일의 오늘이 최고의 삶임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이해인 수녀에게 시란?
= 내 모든 인생의 스토리의 상징이자 기도이다. 소설이나 산문이 해소하지 못하는 짧게 수도자의 삶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선물이자 수도생활을 지탱하게 하는 도구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 능력이 된다면 동화를 쓰고 싶다. 그간 쓴 수필을 엮어서 그림동화로 나온 적이 있는데, 초등학교 교실에서 그 책을 보고 좋은 반응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어린왕자'와 같은 장편 동화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렵고 나이도 있어서 못 이룰 것 같다.

-여러 별명이 있는데, 자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별명이 있다면?
= 세례명이 클라우디아 인데, 구름(Cloud)과 비슷해서 하늘과 땅 사이를 잇는 구름 같은 천사이고 싶어서 '흰구름천사'. 지난 60년 동안 동서남북 날아다니며 구름천사같은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아니면 '마음의 엄마'나 '시엄마', 엄마에게도 말 못한 것을 말하는 이모 같은 역할은 어떨까.

-지금 우리 시대가 소중하게 다뤄야 할 가치는?
= 조금만 더 남을 생각했으면 한다. 우리는 너무 가족 중심적이다. 좀 더 보편적이고,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이타적인 영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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