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명절 대목에도 전통시장은 좀처럼 활기를 띠지 못했다. 차례를 점차 간소화하는 경향이 짙어진 데다가 폭염 등 이상기온으로 장바구니 물가까지 치솟으면서 상인들은 팔리지 않은 재고 처리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시장을 찾은 시민들도 대부분 빈 장바구니를 든 채 한참을 서성이기만 했다.
물가 떨어졌다는데 '장바구니 물가'는?…상인들 '재고' 골머리
추석 연휴가 끝난 19일, 서울 양천구 신영시장 초입에는 '무조건 만 원'이라 써 붙인 포도 상자 수십 상자가 쌓여있었다. 40여 년간 과일 장사를 했다는 손모(58)씨는 "(추석 대목을 맞아) 100상자(3㎏)를 갖다 놓았는데도 40상자가 남았다"며 "사과는 10상자 정도만 갖다놨는데도 6상자가 남았다. 다른 데도 예년에 비해 선물 세트 판매를 50% 정도 줄였다고 들었다"고 했다.손씨는 "날씨가 너무 더워서 오래 두지도 못한다"며 "한 상자당 1만 5천 원에 가져왔는데 1만 원에라도 팔아 없애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팔지 못한 포도 때문에 추석 연휴 3일을 시장에 나와 자리를 지켰다고 했다.
서울 강서구 화곡중앙시장에 25년간 과일 장사를 한 상인도 "작년에 비해 3분의 1도 못 팔았다"며 "올여름 날이 너무 더워서 싱싱한 포도를 가져다 놓아도 금방 우수수 떨어져서, 사 갔던 단골손님들이 다음에 와서 항의하면 보상해 주느라 본전도 못 봤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면서 "사과·배는 작년에 비하면 가격은 거의 비슷한 수준인데도 손님들이 포도 같이 2~3만 원대 상품은 좀 더 쉽게 들고 가도, 사과·배는 한 상자당 5만 원은 넘어가니까 들고 가기 망설이더라"고 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시행으로 매출이 급감했던 코로나19 때보다 서민 체감경기가 더 악화한 것 같다는 의견도 나왔다. 서울 마포구 마포공덕시장에서 30여 년간 반찬가게를 운영한 임모(68)씨는 "50년 장사한 주변 상인들도 이런 추석은 처음이라고 한다"며 "올해가 코로나19 때보다 더 힘들었다. 매출이 작년보다 40% 줄었다. 경기도 안 좋은데 서민들이 돈도 없고 그런가보다"고 했다.
특히 올해 추석 차례상 차림 비용을 끌어올린 주요 품목 중 하나인 시금치, 배추, 무 등 채소류였다. 화곡중앙시장에서 만난 오모(94)씨는 "시장에서 살 게 없다"며 "추석 차례상 장 보면서 시금치 한 단에 1만 원 줬다"고 말했다. 오씨는 "(장바구니 물가 체감상) 올해가 코로나19 때보다 더 힘든 것 같다"고 했다.
이번 주말에 찾아오는 딸과 사위를 위해 장을 보러 나온 강서구민 이모(84)씨는 "잡채 하려고 시금치를 사려고 했는데 너무 비싸서 못 샀다"며 "부추나 청경채로 대체하려고 한다"고 했다. 이씨는 "얼갈이를 사려고 했는데 너무 비싸서 못 살 것 같다"며 채소가게 서너 군데를 지나는 동안 빈 장바구니를 채우지 못했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의 한 채소가게에서는 상인과 단골손님 간 소소한 말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손님이 "배추 크기도 주먹만 한데 4개 2만 원에 달라 한다"며 "원래 깎아주는데 왜 안 깎아주느냐. 뭐가 힘들어서 마음이 변했느냐"고 하자 상인은 "한 포기에 1만 5천 원에 팔았다"며 "(마음이) 변한 게 아니라 (가격이) 비싸다"며 거절했다.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서 반찬가게를 운영하는 김미희(48)씨는 "원래 명절에 시금치·고사리·도라지 등 3가지 나물이 기본인데 올해 시금치는 비싸서 아예 빼버리고 취나물로 대신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김치도 100g당 1만 원에 팔다가 배추·얼갈이·무 등이 다 올라서 1만 5천 원으로 올릴 수밖에 없었다"며 "(손님들이) 평상시에 2만 원어치 살 거를 1만 원어치만 사 갔다"고 했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서 반찬가게를 운영하는 김정순(65)씨도 "시금치는 아예 준비도 안 했다"며 "한 단에 3천~5천 원 하던 게 요즘 1만 5천 원 이상 간다. 키도 작고 양도 얼마 안 나와서 조리해서 팔 수가 없다"고 했다. 김씨는 "추석에는 평상시의 7~8배는 팔아야 하는데 (올해 추석에) 나물을 생각보다 많이 못 팔았다"며 "도라지 같은 경우 6㎏ 정도 준비했는데 4㎏밖에 못 팔았다"고 했다.
차례상 20만 4969원…물가 인상폭 낮아도 '체감경기' 다를 수 있어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는 추석을 한 주 앞두고 조사한 올해 추석 차례상 차림 비용은 평균 20만 4969원으로 작년보다 1.2% 올랐다고 밝혔다. 이 조사는 지난 10일 전국 23개 지역의 16개 전통시장과 34개 대형 유통업체를 대상으로 실시했다. 차례 간소화 경향을 반영해 4인 가족 기준으로 쌀·배추·사과·배·돼지고기·조기·송편 등 총 24개 품목을 조사했다.
aT에 따르면 추석 일주일 전인 지난 10일 기준 시금치 소매 가격은 400g당 1만 6216원으로, 작년(9354원)보다 73.4% 뛰었다. 같은 날 배추는 300g당 825원에서 1055원으로 27.9%, 무는 개당 2127원에서 3470원으로 63.2% 올랐다. 조기 3마리는 3955원에서 4616원으로 16.7% 올랐다.
채소류 등 일부 품목의 가격 상승은 폭염 등 이상기온 영향이 컸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작년에 비해서 올해 고온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됐던 영향이 크다"며 "곧 비 예보가 있는데 비 온 뒤에는 기온이 떨어지면 채소 가격도 어느 정도 안정화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전망했다.
서민들의 체감 물가가 높은 이유에 대해서는 "소비자물가지수가 1천인데, 통신비·주거비·교통비 등이 다 포함되고 그중 농축산물 가중치는 64.8 정도"라며 "전체 물가의 6%밖에 안 되는데 농축산물은 매일 소비하다 보니 체감상 밀접해서 더 민감한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물가 상승률이 한국은행 관리목표치인 2%에 안착했다고 해서 물가 안정을 체감하기 어려운 이유는 실제 재화나 서비스의 시장가격이 떨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경제연구원 주원 경제연구실장은 "물가 상승률이 2%라는 건 1년 전 대비 물가가 2% 올라가 있다는 것"이라며 "1년 전에 비하면 물가는 올라가 있으니 일반 서민들이 체감할 수는 없다. 또 서민들이 민감한 특정 품목 가격이 많이 올랐다면 체감 물가가 높아 보이는 착시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고 했다.
한편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인 미국이 통화정책 방향을 전환하며 2년 넘게 이어온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한국도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2022년 5월 5.3%까지 치솟았던 물가가 2년여 만에 한국은행의 관리 목표치인 2%에 도달하면서, 한은이 오는 10월 11일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인하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