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이 7일 112초 담화 이후 닷새 만에 국민 앞에 섰다. 윤 대통령은 12일 대국민담화에서 "저를 탄핵하든, 수사하든 저는 이에 당당히 맞설 것"이라며 "저를 뽑아주신 국민의 뜻을 저버릴 수 없었다"고 말했다. 무력으로 헌법기관인 입법부와 선관위를 침탈하고도 반성은 커녕 계엄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모습을 볼 때 참으로 위험한 대통령이라는 심증은 굳어진다.
눈길을 끈 대목은 비상계엄을 해석하려 한 부분이다. 탄핵에 대비해 법적투쟁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윤 대통령은 "애당초 국방장관에게 계엄의 형식을 빌려 작금의 위기 상황을 국민들께 알리고 호소하는 비상조치를 하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계엄의 형식을 빌린 비상조치'라는 대목은 마치 유신헌법의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떠올린다.
헌법과 법률에는 비상계엄 발동의 요건을 엄격하게 나열해 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엄의 형식을 빌린 비상조치라는 궤변으로 자신이 자의적으로 해석한 "국정마비의 망국적 비상상황"을 정당화하려 한 것처럼 보인다.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란 대목에서는 통치행위 개념으로 맞서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법률싸움으로 돌파구 모색하는 尹…"마지막 순간까지 싸우겠다"
설사 정당한 비상계엄 조치일지라도 국회에 군을 투입하거나 국회 진입을 막아서는 것은 위법,위헌적이며 내란죄의 성립요건에 해당한다는게 현행 법체계이다. "도대체 2시간 짜리 내란이라는 게 있냐?"고 변명한 것도 과거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국회의사당을 무력으로 봉쇄하고 국회의원 출입을 통제한 사실에 대해 대법원이 국헌문란이자 내란죄에 해당한다는 판례를 남긴 것에 배치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회 병력투입 이유로 거대 야당의 망국적 행태를 알리고, 국회 관계자와 시민들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라며 국회해산이나 기능마비를 위한 게 아니라고 강변했지만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과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의 증언에 반한다. 곽 전 사령관은 윤 대통령이 계엄직후 전화를 걸어 "(본회의장) 문을 부수고 들어가 의원들을 끄집어내라"고 지시했다고 말했고, 홍 전 차장은 "이번 기회에 싹 다 잡아들여 정리하라"는 대통령의 육성 지시를 받은 뒤 방첩사령관으로부터 체포자 명단을 전달받았다고 실토했다.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의 '결단'을 내린 또다른 이유로 선거관리위원회의 시스템 관리 문제를 꺼냈다. 지난해 하반기 북한의 해킹 공격을 계기로 선관위 시스템의 취약성이 드러났다면서 "민주주의 핵심인 선거를 관리하는 전산시스템이 이렇게 엉터리인데 어떻게 국민들이 선거결과를 신뢰할 수 있겠냐?"라고 주장했다. 극우단체나 보수 유튜버들이 주장해온 총선 부정선거설에 매몰돼 있음을 반증한다. 선관위 서버를 무단으로 확보한 뒤 계엄사 합수부 수사 등을 통해 여소야대 지형을 한방에 뒤흔들려는 의도였다면 소름이 끼친다. 선관위는 "부정선거에 대한 의혹 제기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선거관리시스템에 대한 자기부정과 다름없다"고 반박했다.
채상병 사망사건과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명품백 수수의혹 등으로 인해 당시 각종 여론조사는 이미 4.10총선에서 여당 참패를 예측한 바 있다. 총선 참패의 원인으로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이 지목돼 왔었는데 스스로 반성하기는커녕 음모론에 매몰된 나머지 국회와 선관위를 겨냥해 군사작전을 감행했다니 대통령직을 하루라도 더 유지시키기엔 위험천만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언급한 예산 삭감이나 형법의 간첩죄 조항 개정 문제는 협상과 설득이 작동하는 정치의 영역에서 풀 문제다. 그것이 싫다면 민심을 얻어 다수당이 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게 정상적인 국정운영 원리다. "위헌적 특검법안을 27번이나 발의"했다고 비판하면서,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기 위한 김건희 특검법엔 거듭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 자체가 이율배반적이다. 공정과 상식을 외치고도 본인과 가족의 의혹에는 온갖 무리수를 동원해 방패막을 치고, "(야당이) 자유민주주의 헌정 질서를 파괴하는 괴물이 됐다"며 비상계엄 선포의 이유로 삼는다면 더이상 민주국가의 지도자로 보기 어렵다.
그는 대국민담화 말미에 "저는 마지막 순간까지 국민 여러분과 함께 싸우겠다"고 했다. 애석하게도 함께 싸울 국민보다 대적해야 할 국민이 압도적으로 많은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져들고 있는 윤 대통령이다. 최근 엠브레인퍼블릭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8명 가량이 탄핵에 찬성하고, 10명 중 7명은 내란죄 처벌에 동의했다고 한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이번 대국민담화로 사태 해결의 가닥은 더욱 뚜렷해졌다. 계엄도 불사한다는 사고체계의 소유자로부터 대통령직을 회수하는 일이다. 그것도 하루 빨리. 윤 대통령이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국민불안을 해소하는 게 이 시점 정치권의 시급한 책무다.
국민의힘, 역사의 기로에 서다
야6당이 두 번째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함에 따라 14일 오후 표결이 이뤄질 예정이다. 현재까지 공개적으로 '탄핵 찬성' 입장을 밝힌 국민의힘 소속 의원은 안철수, 조경태, 김상욱, 김예지, 김재섭, 진종오 의원 등 6~7명이다. 지난주보다 탄핵안 가결 가능성이 약간 높아졌으나 여전히 미지수다.
윤 대통령이 여당의 '질서있는 퇴진' 논의마저 거부한 채 법적 투쟁을 선언한 만큼 헌재 탄핵심판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건 자연스런 수순이다. 12.3사태 이후 칩거하는 동안 헌재 재판관 친인척인 박선영 전 의원을 최근 진실화해위원장에 임명한 것이 탄핵심판 대비용이라는 해석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국민의힘이 14일 표결에서 탄핵안을 거부한다면 자가당착에 빠지는 셈이다.
또한 윤석열을 대선후보로 배출한 국민의힘이 내란사태가 벌어진 뒤에도 '원조친윤' 권성동 의원을 원내대표로 뽑은 것은 당명에 갖다쓴 '국민'을 우습게 보는 처사나 다름없다. 국민의힘은 시시때때로 '당과 대통령은 운명공동체'라며 원팀을 강조한 나머지 사실상 용산출장소를 자처했다. 따라서 근원적으로는 비상계엄 사태의 정치적 책임을 나누어져야 할 주체임에 틀림없다. 석고대죄하고 자숙하지는 못할망정 당 장악과 계파싸움에 몰두하는 모습이 실망스럽다.
국민의힘은 이제 역사의 기로에 섰다. 헌법을 유린하는 내란사태가 발생했는데도, 내란죄 피의자에 대한 정치적 처분을 미룬 채 차기 대선 운운하며 이해득실만 따지려든다면 역사의 심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2030세대의 탄핵응원봉 물결을 보지 못했는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탄핵사태의 후폭풍이 향후 수 십년간 정당정치의 판도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모든 과정은 역사에 똑똑히 기록되고 기억되어 영원히 박제될 것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는 '질문이 문학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한강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집중했다. 그렇다. 현재도 먼 훗날 과거가 될 것이다. 훗날을 도울 지금 이 순간에 모두가 충실해야 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