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내란 사태 이후 거리에는 응원봉의 색만큼이나 다양한 목소리가 등장했다. 장애인, 농민,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등 주변부로 치부됐던 이들의 외침이 광장에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2016년 박근혜 퇴진 집회 때와는 달리, '윤석열 탄핵'이라는 대의를 넘어 각양각색의 외침에 시민들이 귀를 기울이고 또 손을 내밀고 있다. 탄핵집회가 보여준 연대의 가능성을 두고 탄핵 이후 변화할 한국 사회에 대한 기대가 나온다.
탄핵 집회에서 전장연·남태령 집회로…번지는 연대
24일 아침 8시 서울지하철 3호선 안국역 승강장에는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민주주의"라는 구호와 '다시만난세계'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10차 다이인(Die-in, 차별에 대한 항의 표시로 죽은 듯 누워 있는 시위 방법) 행동' 집회에 참여한 시민과 활동가 300여 명(집회측 추산)의 목소리였다. 이날 현장에는 전장연이 지난 2021년 지하철 투쟁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많은 일반 시민이 모였다.서울교통공사 직원과 합세한 경찰의 진압 때문에 일부 활동가가 휠체어에서 떨어지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전 집회와 달리 전장연은 다이인 행동을 끝까지 마치고 헌법재판소까지 행진할 수 있었다. 활동가들을 끌어내지 못하도록 시민들이 대오를 맞춰 함께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필순 전장연 조직실장은 CBS노컷뉴스에 "이전까지 지하철 행동에 참여해본 적은 없지만 탄핵 집회를 통해 함께하기 위해 왔다는 자유 발언이 굉장히 많았다"며 "탄핵집회와 남태령에서 전장연이 깃발을 흔들고 목소리를 냈었는데 시민들이 잘 알고 계시더라. 연대로서 이뤄졌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김 실장은 "시민들의 참여가 든든했다"며 "집회 중 역장이 경고 방송을 하자 시민들이 야유하며 목소리를 지웠다. 이런 방식이 집회에 나온 것이 처음이라 뭉클했다"고 밝혔다.
지난 21일 밤 서울 서초구 남태령 고개에 3만명(집회측 추산)이 결집했다. 경찰 차벽에 고립된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 등의 '전봉준 투쟁단' 트랙터 행진에 연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여든 시민들이었다. 영하의 날씨,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앉은 시민들은 날이 밝을 때까지 "차 빼라", "윤석열 탄핵"을 외쳤고 결국 경찰은 다음 날 오후 4시 40분쯤 차벽을 해제했다.
밤새 현장을 지켰던 30대 여성 홍모씨는 "개인적인 일이 있어 서울에 왔던 차에 SNS에서 소식을 보고 달려갔다"며 "양심이라고 해야 할까. 연대하기 위해서였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남태령 집회의 경험이 농민에 대한 관심으로도 번졌다. 온라인상에는 트랙터 기름값, 수리비에 보태자며 전농과 전여농 후원 독려가 이어졌다. 중간 유통과정 없이 농민이 직거래하는 협동조합인 '언니네 텃밭'도 알려지며 방문·주문이 폭증했다.
'페미니스트-성소수자'가 요구한다 "윤석열 탄핵"
윤석열은 대선 후보 시절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 삼으며 성차별을 개선하라는 정당한 요구를 남성의 권리를 축소시키는 것으로 매도하며 젠더갈등을 조장한 바 있다.
여성단체 활동가들은 여성을 비롯한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자며 현장의 집회 중 '여성 혐오' 발언을 경계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30대 여성 최모씨는 "여성단체 발언 때 듣고 있는 동료 시민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보고 든든했다. 이곳에서 모두와 연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밝혔다.
성소수자 공동행동 '무지개 행동'은 이날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집회 현장에 '퀴어 무지개존'을 열었다.
성소수자의 상징인 무지개 깃발을 들고 집회에 참석한 20대 이모씨는 "무지개 깃발을 흔들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가 가장 바라는 것이 평범하게 여겨지는 것"이라며 "정치권에서는 늘 차별금지법 이슈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보다시피 이곳에서 나는 동료 시민이다"고 밝혔다.
지난 22일 전태일의료센터 후원 홈페이지가 접속이 몰려 마비되는 일도 있었다. SNS에 전태일의료센터 건립 참여 후원 독려글이 퍼지면서다.
임상혁 녹색병원 원장은 다음날 페이스북에 "전태일의료센터 홈페이지가 접속 용량 초과로 다운됐다. 자정을 넘겨 초기화되면서 다시 복구됐는데 어제 하루만 2727건, 2억 7800만 원의 기부가 들어왔다"며 ""아름다운 연대가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의 건강을 위한 의료기관인 녹색병원은 지난해 9월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위원회(건립위)를 출범하며 50억 원을 '전태일벽돌기금'이라는 이름을 붙인 시민 후원금으로 마련 중이다.
"나라 어지럽지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게 됐다"
21일 탄핵집회에서 만난 시민들은 집회에서 나온 다양한 목소리를 환영했다.
남편·자녀와 집회에 참석한 30대 이모씨는 "평소 장애인, 노조, 페미니스트, 성소수자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지 않나. 그분들이 (집회에서) 목소리를 내는 걸 들으며 전반적으로 이해가 높아졌다"며 "좀 웃기긴 하다. 나라가 난리가 난 상황이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장이 되지 않았느냐"고 밝혔다.
50대 여성 김모씨는 "우리나라가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깃발이 휘날리는 것이 참 아름답다"며 "이런 목소리를 담은 소수정당이 존재감을 낼 수 있는 정치적·제도적 상황이 마련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밝혔다.
응원봉을 든 30대 여성 박모씨는 "출근길에 장애인 이동권 시위하는 장면을 많이 봤다. '왜 서울시는 이야기를 안 들어줄까, 대화의 장을 만들면 이 날씨에 고생 안 해도 되는데'라는 생각을 평소에 했다"며 "어떻게 보면 우리도 똑같다. '특검 받아야 한다', '탄핵 인용 되어야 한다'는 민심을 전하기 위해 이렇게 시위하고 있다. 누구든 목소리를 내고 서로 잘 들어주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30대 남성 구모씨는 "다양한 사람들이 나왔지만 결국 목표는 하나다. 집회 현장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며 알게 된 것들도 있다. 윤석열 파면 이후 국가가 정상화된다면 각 집단에서 주장하는 것들도 진지하고 깊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