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하는 사람들이 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가. 올라가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하는 사람이 겪는 속 터지고 억울한 일은 그림자 속의 그림자다. 보려 하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올려다보는 곳에 프래카드를 내걸어야, 그곳의 일이 이른 새벽의 빛처럼 조금씩 드러난다. 왜 올라가는가. 올라가지 않으면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일터, 그곳의 비명과 울음은 좀체 들리지 않는다. 야생의 동물처럼 울부짖어도 이웃집 텔레비전 소리만큼도 들리지 않는다. 올라가서 외쳐야, 그제서야 아련한 소리로 들린다.
세상의 하늘은 오늘도 맑았지만, 그 하늘 아래 누군가는 30미터 철탑 위에서, 누군가는 불탄공장 옥상에서, 또 누군가는 명동역 지하차도 철제 구조물 위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땅 위에서 외면당한 이들이 하늘 위로 올라간 건, 단지 더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지 "살고싶다"는 가장 인간적인 절규를 전하기 위해서다.
박정혜, 고진수, 김형수. 이 세 이름은 더 이상 특정사업장의 개인이 아니다. 그들은 법의 빈틈을 꿰뚫고 살아남은 기업 논리 앞에서, 제도라는 이름으로 방치된 수많은 일하는 사람의 얼굴이다. 불이 난 공장에서 보험금만 챙기고 사라진 외국기업, 정리해고의 명분이 사라졌는데도 침묵하는 경영진, 그리고 하청노동자의 입을 틀어막고 손해배상으로 짓누르는 대기업. 이들이 남긴 공통의 흔적은 '책임 없음'이다.
그러나 이 책임은 누구의 몫인가. 세 사람은 말한다. 이건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국회가 만든 문제라고. 고용승계를 막을 수 없고, 정리해고를 되돌릴 수 없으며, 파업을 하면 곧바로 손해배상을 청구 당하는 이 제도는 누가 만든 것인가. 바로 우리의 대표들이 만든 법의 구조이고, 그 구조 속에서 노동자들은 떨어지지도 못할만큼 위태로운 철탑 위로 몰려가고 있다.
500일, 98일, 68일(5월 21일 기준). 숫자는 차갑지만 그 속엔 추위와 더위, 고독과 분노, 그리고 절박한 희망이 켜켜이 쌓여 있다. 누구도 쉽게 오르지 못할 그곳에 올라서야만 들리는 이 목소리를, 우리는 얼마나 오래 외면할 것인가.
어느 시인은 말했다. 산은 오르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려오기 위해 있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다만, 그 산을 내려오게 하는 것은 이미 춥고 더운 곳에 오른 그들이 아니라, 땅 위에 머물러있는 자들의 몫이다. 하늘 위로 떠밀려 올라간 노동자들의 절규가 더 이상 고공에 머무르지 않도록 이제는 땅 위의 우리가 책임져야 할 시간이다.
내란이 시민의 권리를 송두리째 앗아가는 행위라고 한다면,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일터에서 내란의 일상을 겪는 노동자들이 많다. 그들이 더 이상 위험하고 높은 곳에 오르지 않게 해야 하는 것이 내란 종식의 진정한 시작이다. 그래서, 오늘도 내가 있는 ILO 본부 창밖으로 보이는 한국사회의 선연한 중심은 박정혜, 고진수, 김형수가 오른 고공의 삶이다.
*이 칼럼은 한국옵티칼하이테크 박정혜 여성노동자의 고공농성 500일, 세종호텔 고진수 98일, 한화오션 김형수 68일을 맞아 제작된 <굴뚝신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굴뚝신문> 제작에는 고공농성 해결을 촉구하는 14개 언론사 현직 노동기자들과 사진작가, 교수, 노동운동가들이 참여했습니다. ☞ <굴뚝신문> 구매 https://url.kr/wlcun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