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독이 든 사과, 독이 든 성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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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실학자 정약용이 국가제도의 모순과 개혁의 방향을 담아 저술한 <경제유표>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부잣집 자식은 입에 아직 비린내가 나고 눈으로는 고무래 정(丁)자를 모르는 자라 할지라도 거벽의 글을 빌리고 사수의 글씨를 빌려서 시권(답안지)를 바친다"(경세유표 권15).
 
거벽(巨擘)은 문장에 능숙한 자, 사수(寫手)는 글씨를 잘 쓰는 자를 일컫는데, 돈 있고 빽있는 집안의 자제는 비록 일자무식이지라도 문장 좋고 서예에 능숙한 이른바 1타강사를 시험장에 대동해 과거시험을 치렀다.
 
임오과옥이라 불리는 악명높은 채점 부정 사건은 입이 떡 벌어진다. 1702년 알성시에서 합격자 9명 중 8명이 채점자와 4촌 이내 친인척인 것으로 드러날 정도로 당시 인재등용을 둘러싸고 조직적 부패가 극에 달했다.
 

시험지 유출은 독이 든 사과

지금 우리 사회는 학부모와 교사, 학생들이 내신성적을 훔치려는 그릇된 욕망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최근 경북 안동의 한 여고에서 고3 학생의 어머니와 기간제 교사가 공모해 시험지를 뻬돌린 초유의 학사부정 사건이 적발됐다. 1학년 때부터 전교1등을 도맡아오던 학생은 훔친 시험지 없이 치른 3학년 1학기 기말고사에서 수학 40점, 윤리 80점이라는 '믿기지 않는'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교무실 침입 당시 비상벨이 울리지 않았다면 학생은 아마 전교1등으로 졸업해 좋은 대학에 입학할지도 모를 일이다.
 
안동 사건이 학부모와 교사의 공모로 이뤄졌다면 2018년 숙명여고 쌍둥이 자매 사건은 학부형이자 교무부장이 같은 학교에 다니던 딸들을 위해 시험지와 답안지를 빼돌려 각각 문,이과 전교1등을 만든 사건이었다. 2022년 광주에서는 학생 2명이 과목별 교사의 노트북 4대에 악성코드를 심어 시험지를 빼돌리는 대담한 사건까지 발생했다. 범행동기는 "좋은 대학에 가고 싶었다"였다.
 
시험기간 학교 무단 침입한 기간제 교사가 피의자 심문을 받은 후 이동하는 모습. 연합뉴스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크고 작은 시험지 유출사건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성적이 윤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안들킨 비리는 또 얼마나 많을까.
 
단언컨대 내신 도둑질은 '100점 만점, 1등'처럼 겉보기에 매력적이어도 결국 독이 든 사과다. 쌍둥이 자매 사건에서 아버지 현 모씨는 업무방해죄로 징역3년의 실형이 확정됐고, 두 딸은 징역형 집행유예와 퇴학조치를 당했다. 어른들의 그릇된 욕심이 자녀의 앞길을 가로막은 셈이다.
 
적발되지 않는다 해도 독인 건 마찬가지다. 자녀들은 부정과 반칙으로 인한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고, 정직과 공정, 성실의 가치를 배울 기회도 박탈당하게 된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 부적응하거나 동료를 짓밟고 올라가려는 인격의 소유자가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공정해야 할 교육이 부정과 비리로 더럽혀지는 현실은 우리 사회 모두에 독이다.
 

극우 기득권 타파를 위해 독배를 들 때

작금의 정치 현실에서는 극우의 유혹이 독이다. 대선후보를 지낸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장관은 불과 1달 반 전 치른 대선에서 내란심판 민심을 체감하고도 당대표 출마선언에서 여전히 민심과 동떨어진 인식을 드러냈다.
 
김 전 장관은 윤 어게인과 부정선거음모론을 외치는 전한길씨의 입당에 대해 "절차에 문제가 없다. 받아들여야 한다"고 밝혀 극우세력이 대놓고 당에 뿌리를 내리는 데 찬성했다.

윤희숙 혁신위원장의 인적쇄신안에는 "당이 쪼그라드는 혁신은 자해행위"라고 선을 그었다. 새 정부의 국정수행지지율이 60%대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유례없는 이재명 총통독재', '입법폭주' 운운하는 건 상식과 거리가 있다.
 
혁신위원회의 혁신안이 의원총회에서 통과되지 못하면 국민의힘 혁신작업의 운명은 차기 지도부로 넘어가는데, 이대로라면 오히려 보수정당이 아스팔트 극우보수에 잠식당하는 걸 우려해야 할 판이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 연합뉴스

한동훈 전 대표는 "쇄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저항, 묻지마 단결론이 거세더니 급기야 윤어게인, 부정선거론을 선동하는 세력이 우리 당을 접수하겠다고 선언했다"며 "국민의힘의 극우정당화를 막아내야 한다"고 호소했다.
 
국민의힘이 탄핵의 강을 건너지 못하는 한 무너진 둑을 막기에 역부족일 것이다. 내란동조세력의 교체를 위해서는 제 세력의 힘을 모으는 연대도 필요할 것이다. 지방선거 책임론이 무서워 혁신의 기치를 들지 못한다면 전국정당은 고사하고 영남기득권 집단에서 벗어날 길도 요원하다.
 
독이 든 성배, 즉 독배가 영광이 될 수 있는 경우는 사명감을 가지고 스스로 십자가를 질 때뿐이다. 새로운 혁신의 에너지로 판을 뒤흔들어야 기득권 구조에 구멍이라도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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