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에서 '트럼프 리스크'가 또 터졌다. 이번 진앙지는 미국 동남부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한국인 300여명이 미 이민 당국에 전격 체포되었다. 미 국토안보부 (ICE) 역사상 최대 규모의 현장 단속이란다.
이 사건이 조지아주에서 벌어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지아는 오랫동안 공화당의 안정적인 텃밭으로 불린 '레드 스테이트(Red State)'였다. 그러나 2020년 대선에서 바이든이 트럼프를 0.2%p 차이로 꺾고 선거인단 16명을 가져가는 이변이 일어났다. 당시 애틀랜타 교외를 중심으로 아시아계·히스패닉 등 유색 인종 유권자가 급증한 것이 결정적 요인으로 분석됐다.
이후 바이든과 민주당은 선거 승리에 주효했던 조지아주에 각별한 공을 들였다. 2022년 만든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앞세워 대규모 세제 혜택을 제공하며 미국 남동부를 '바이든표 제조업 부흥지대'로 재편하는 데 집중했다. 이번에 문제가 된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투자도 이때 나왔다.
2023년에는 SK온-현대차그룹 역시 조지아주에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을 결정했다. 한화큐셀도 미국 태양광 산업 역사상 최대 규모인 25억 달러를 투자해 조지아에 태양광 통합 생산단지를 세웠다. 당시 바이든은 "조지아 노동자와 가족, 그리고 미국 경제에 대형 호재"라는 성명까지 발표했다. 그러면서 "조지아에서 4년제 대학 학위가 필요 없는 수천 개의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니 다음 선거에서도 우리를 선택해 달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2024년 대선에서 조지아주는 트럼프를 선택했다. 트럼프는 카멀라 해리스를 2.2%p 차이로 누르고 조지아를 다시 탈환했다. 현재 조지아의 연방 상원의원 2명은 민주당, 주지사는 공화당이다. 전형적인 '스윙 스테이트(Swing State)' 경합주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정치 공학적으로 본다면, 조지아는 한국의 충청권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조지아주 현대차 공장에서 대규모 이민 단속을 벌인 것도 이런 맥락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바이든이 "미국인을 위한 양질의 일자리"를 만든다고 자랑했던 현장에서 정작 '불법 이민자'들이 일하고 있었다는 모양새를 연출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트럼프는 이번 사태에 대해 "거기에는 불법 체류자들이 많이 있었다"며 "그들은 바이든 정부 시절 국경을 넘어온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더구나 해당 공장이 자신이 공개적으로 비판해온 전기차 배터리 생산 거점이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이번 단속은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를 극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는 무대였다고 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 사태를 두고 대미 투자 이행 계획이나 방위비 분담금 인상 등과 연계한 일종의 '한국 길들이기'로 해석한다. 그러나 애초부터 한국을 겨냥해 이민 단속을 기획했을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내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트럼프 행정부가 '마가(MAGA)'의 핵심 어젠다인 이민자 문제와 제조업 부흥에 강하게 드라이브를 거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로 해석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
문제는 이제 '미국 제조업 부흥'이라는 의제가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의 핵심 관심사로 자리 잡았고, 여기에 한국 기업들이 깊숙이 얽혀 있다는 점이다. 또한 어떤 의도에서든, 이런 조치들이 결과적으로 한국에 대한 정치적 압박 효과를 동반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겐 큰 부담이다.
압박을 조금이라도 완화하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할 수 있다면 '트럼프 리스크'를 국내 정쟁의 소재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정상회담 성공했다고 하더니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식의 비판은 사태를 정쟁화하는 것이다. "이런 일들 때문에 정상 소통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보다 정확하다. '워싱턴 정치'가 한미관계에 불필요한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트럼프를 '피스 메이커'로 치켜세워주고 '얼음공주'와의 번개도 필요했던 것 아닌가. 한국인 구금자 석방 협의가 마무리 되고 있어 다행이다.
박형주 칼럼니스트
- 전 VOA 기자, 『트럼프 청구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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