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송언석의 연설, 유승민의 연설

2015년 올해의 사자성어 '혼용무도'. 연합뉴스

2015년 '한국 사회를 규정하는 사자성어로 당시 대학교수들은 혼용무도(昏庸無道)를 꼽았다. 혼용은 혼군(昏君)과 용군(庸君)이 합쳐진 말로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가 세상을 어지럽고 무도하게 만든다는 뜻의 사자성어다. 지도자에게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의미가 담겼다.
 
교수들은 왜 F학점에 가까운 이런 평가를 내렸을까. 당시로 돌아가 보자. 2015년 초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로 국민이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정부는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였다. 청와대는 여당 원내대표에게 사퇴 압박을 가하면서 의회주의 원칙을 스스로 훼손했다. 후반기 들어서는 국정교과서 논란으로 국력을 소진했다. 이듬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박근혜 탄핵이 현실화된 것을 보면 혼용무도(昏庸無道)는 2016년을 예견하는 말이기도 했다.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29회국회(정기회) 제3차 본회의에서 국민의힘 송언석 원내대표가 교섭단체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

그리고 10년 뒤 혼용무도란 말이 다시 등장했다. 이번엔 정치인의 입에서 나왔다.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10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이재명 정부 출범 100일은 한마디로 '혼용무도 즉, 어리석은 군주가 세상을 어지럽게 만든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역류와 퇴행의 국정운영 100일을 목도하면서, 쌓여가는 국민의 한탄과 원성을 들으면서, 오만하고 위험한 정치세력에게 국가 권력을 내준 우리 국민의힘의 과오가 더욱 한탄스럽다"고 탄식했다. 현 정부를 향해 "왜 스스로 파멸의 절벽을 향해 가속페달을 밟느냐, 일당 독재의 폭주를 멈추라"고도 했다.
 
구구절절 스스로에게 해야 할 말들이다. 아무리 정치인이 말로 먹고사는 직업이라고 해도 '아무말 대잔치'여선 곤란하다. 임기도 못 채우고 쫓겨난 윤석열 정부에 들어맞을 말을 억지로 갖다 붙인 느낌이다. 송 원내대표의 주장대로 역류와 퇴행의 국정운영 100일이었다면 민심이 보내고 있는 60% 초반의 국정운영 지지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란사태가 초래한 무질서를 극복하고 국정운영의 정상화를 인정받은 결과가 현재의 성적표일 뿐이다.
 
다시 1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2015년 4월 8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의 교본이라 할 명연설이 나온다. 유승민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2015년 4월 8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 윤창원 기자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
저는 매일 이 질문을 저 자신에게 던집니다.
15년 전 제가 보수당에 입당한 것은 제가 꿈꾸는 보수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꿈꾸는 보수는 정의롭고 공정하며, 진실되고 책임지며, 따뜻한 공동체의 건설을 위해 땀 흘려 노력하는 보수입니다".

 
보수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 명연설에 야당도 박수를 보냈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진영은 그 본질이 독재와 똑같다. 진영의 울타리를 쳐놓고 그 내부 구성원들에게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며 여와 야, 보수와 진보에 퍼져있는 진영의 논리를 꾸짖었다.
 
"지난 3년간 예산대비 세수부족분이 22조 2천억원이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임이 입증되고 있다"는 발언도 이때 나왔다. 여당 원내대표로서 박근혜 대선공약과 정부 정책의 문제점을 반성하고 비판한 것으로, 당시의 정치환경에서는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보수의 길을 제시했던 유승민 전 원내대표는 이후 '배신의 정치'로 낙인찍혔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반성할 때 마음이 움직이는 법이다. 송 원내대표의 눈에는 '역류와 퇴행의 국정운영 100일'만 보이고 헌법파괴적 비상계엄과 셀 수도 없는 국정농단은 보이지 않을까. 박수부대로, 용산출장소로 전락했던 보수는 윤석열 정권 파멸의 공범자다.
 
탄핵의 강을 제대로 건너지도 않은 채, 아무 일 없다는 듯 야당 역할 하겠다며 "한미정상회담은 얻은 것 없는 빈손 쭉정이 회담이었다"고 비판의 나발을 분다고 국민이 감동하지 않는다.
 
"오만하고 위험한 정치세력에 국가 권력을 내준 국민의힘의 과오가 한탄스럽다"고 탓하기에 앞서 윤석열-김건희의 폭주와 농단을 막지 못한 과오를 사죄하는 게 우선이다. 인정하고 사과하고 죗값을 치러야 새로운 한 발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부디 국민의힘은 '정치를 왜 하는가' 자문했던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그때 그 연설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길 간곡히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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