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보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처럼, 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담아낸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 관객들이 수여하는 국제 관객상의 영예를 거머쥐었다. 박 감독은 모두가 공감하겠지만 특히 "한국 관객이라면 혀를 끌끌 차며 볼 것"이라고 귀띔하며 호기심을 자극했다.
'어쩔수가없다'는 '다 이루었다'고 느낄 만큼 삶이 만족스러웠던 회사원 만수(이병헌)가 덜컥 해고된 후 아내와 두 자식을 지키기 위해, 어렵게 장만한 집을 지켜내기 위해, 재취업을 향한 자신만의 전쟁을 준비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이자 제50회 토론토국제영화제 국제 관객상의 첫 주인공이 된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 감독 작품 중 최초로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17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중극장에서 열린 '어쩔수가없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박찬욱 감독은 "오랫동안 준비해 온 작품인데, 부국제가 오랫동안 해온 가운데 개막작으로 온 건 처음인 데다 30주년이라 더 설렌다"고 소감을 전했다.
'어쩔수가없다'는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를 본 후 매료된 박찬욱 감독이 오랜 시간 영화로 만들길 바랐던 작품이다. 소설 속 코미디의 가능성과 가족들이 주인공의 일을 눈치채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했을 때 훨씬 새롭고 대담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박 감독은 "개인의 이야기와 사회적인 이야기가 완전히 결합해 밖으로도, 안으로도 향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 가능성을 봤다"며 "거대한 역설이랄까. 가족을 지키겠다는 아주 순수한 동기에서 내가 사랑하는 직업에 계속 종사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 도덕적인 타락으로 이어진다는 걸 깊게 파고들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박 감독은 '액스'가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성'이 있기에 지금 시대에 선보여도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대신 박 감독은 여기에 지금 시대만이 가진 '특수성'을 넣었다. 바로 AI(인공지능)다.
박 감독은 "AI의 발전이 근본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아직 우리 산업과 일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단계는 아직 아니지만, 발전 속도를 가늠하기 어렵기에 조만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며 "각본의 마지막 단계에서 낸 아이디어다. 계속 탐구해서 심지어 편집도, VFX도 다 끝난 상태에서도 이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어쩔수가없다'는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던 만수는 자신의 재취업에 방해가 되는 경쟁자들을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해고, 재취업, 자신이 해온 일에 대한 자부심 등 여러 가지 면에서 현실의 나와 우리를 만날 수 있다.
박찬욱 감독 역시 원작 소설을 읽으면서 이러한 지점에서 쉽게 감정 이입할 수 있었다. 그는 "영화 속 인물들은 보통 사람들이 대단한 일로 생각하지 않는 종이 만드는 일을 인생 그 자체라고 말한다"며 "영화도 어찌 보면 삶에 큰 도움을 주는 일은 아니고 오락거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일에 내가 가진 것을 쏟아부으며 인생을 통째로 걸고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쩔수가없다'는 자연스럽게 어려운 시기를 관통하고 있는 영화업계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박 감독은 "영화업계가 어렵고,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코로나19 팬데믹에서 회복하는 게 더딘 건 사실인 것 같다"며 "그러나 영영 이런 상태에 머물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쩔수가없다'가 늪에서 빠져나오는 데 조금이라도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랄 뿐"이라고 전했다.
이병헌 역시 "베니스와 토론토에서도 영화업계의 위기감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며 "영화도 어렵지만 사실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 극장이다. 어떻게 이 어려움을 타개하고 극장이 다시 관객들에게 사랑받는 장소가 될 수 있을지 모든 영화인이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쩔수가없다'를 통해 7년 만에 스크린으로 복귀한 손예진도 "앞으로 얼마나 더 자주, 더 오래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함이 있다"며 "그런 의미에서 박찬욱 감독님 같은 분들이 작품을 많이 만들어주셔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는 방향으로 가게끔 열심히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밝혔다.
박찬욱 감독의 오랜 열망이자 베니스와 토론토를 열광케 한 '어쩔수가없다'는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아시아 관객들에게 처음 선보이게 된다. 감독과 배우들은 특히 한국 관객들이 어떤 감상을 남길지 가장 궁금하다고 입을 모았다.
박찬욱 감독은 "미국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한국으로 배경으로 옮기면서 집에 대한 집착, 가부장 사회의 흔적으로 갖게 된 만수라는 인물의 한계나 어리석음 등을 표현하려 노력했다"며 "어느 나라 관객보다 한국 관객이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하고 혀를 끌끌 차면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배우들은 한 번 볼 때와 두 번 볼 때의 감상이 다르고, 새롭게 보이는 요소들이 있는 만큼 극장에서 N차 관람할 것을 추천했다.
이병헌은 "긴 시간 작업을 함께한 배우로서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두 번 볼 때와 세 번 볼 때가 정말 달랐다"며 "극장의 큰 화면으로 디테일을 보다 보면 감독님의 미장센을 새롭게 발견하고, 왜 그때 내게 그런 주문을 하셨는지 새로운 깨달음이 생긴다. 극장에서 꼭 봐야 할 이유가 너무나 분명한 영화"라고 이야기했다.
박희순도 "영화를 두 번 봤는데, 처음엔 웃었는데 두 번 볼 때는 내가 가장 많이 웃었던 장면에서 눈물이 났다. 마지막에 끝나갈 때쯤엔 만두가 될 정도로 눈이 부었다"며 "그게 참 희한하더라. 같은 영화, 같은 장면에서 한 번은 웃고 한 번은 눈물 흘릴 수 있다는 게 이 영화의 큰 매력"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어쩔수가없다'는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 프리미어로 선보인 후 오는 24일 극장에서 관객들과 만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