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영화계에서 글로벌 협업은 이제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 잡았다. 아시아 영화, 특히 독립·예술 영화 제작자에게 국제 공동 제작은 '기회'가 되고 있다. 부산에 모인 아시아 영화인들은 국제 공동 제작 시장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18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부산 영상산업센터에서는 '2025 포럼 비프 연대를 꿈꾸는 아시아 영화-아시아영화, 국제공동제작의 새 챕터를 열다'를 주제로 국제 공동 제작의 가능성과 과제를 진단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아시아 영화계에서 글로벌 협업은 단순한 자본과 인력의 결합을 넘어, 작품에 새로운 미학적 감각을 불어넣고 국제무대에서의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최근 주요 국제영화제에서 국제공동제작 작품들이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아시아 각국 영화의 위상에도 변화를 예고하는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특히 올해 칸영화제에서는 이시카와 케이 감독의 '어 페일 뷰 오브 힐스', 하야카와 치에 감독의 '르누아르' 등 일본 아트하우스 영화가 화제의 중심에 섰다. 유럽 국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완성된 이들 작품은 높은 예술성과 함께 국제적 주목을 이끌며 공동제작이 지닌 창작적·전략적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아직 그 수는 많지 않지만, '어 페일 뷰 오브 힐스' '르누아르' 외에도 하야카와 치에 감독의 '플랜 75'(2022), 빔 벤더스 감독의 '퍼펙트 데이즈'(2023), 에릭 쿠 감독의 '스피릿 월드'(2024) 등 최근 몇 년간 일본의 국제 공동 제작 작품들이 국제영화제에서 자주 모습을 드러내며 호평받고 있다.
'플랜 75' '르누아르'의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국제 공동 제작을 통해 원하는 작품을 완성한 경험을 공유했다.
한 예로, 일본에서 '르누아르'와 같은 아트하우스 영화의 후반 작업에 충분한 기간과 예산을 할당하지 않는 경향이 강한데, 프랑스와 공동 제작을 하면서 약 5개월에 걸친 후반 작업 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개발 단계부터 후반 작업까지 다양한 단계에서 감독을 지원하는 '필름랩'을 통해 영화 제작 과정 전반에 걸쳐 다양한 형태의 지원과 실질적인 조언을 받을 수 있었다.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앞으로 영화를 만들려는 젊은 감독들에게 국제 공동 제작에 참여하는 것을 권장한다"며 "창의적인 측면에서도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영화를 완성할 수 있다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그릴 힘을 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플랜 75' '퍼펙트 데이즈' 등의 성공은 대형 스튜디오들이 국제 공동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계기로 이어졌다.
75회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 특별언급 '플랜 75'와 올해 칸영화제 초청작 '르누아르'의 에이코 미즈노 그레이 프로듀서는 "'플랜 75'를 제작할 때, 신인 감독의 데뷔작이라 예산 확보가 어려웠다"며 "그러나 '플랜 75'가 국제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뿐 아니라 일본 내 흥행도 좋은 성과를 거뒀다. 이후 이러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대형 스튜디오의 연락이 늘었다"고 말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인 '디어 스트레인저'(감독 마리코 데쓰야) '연애재판'(감독 후카다 코지)도 각각 일본 대표 제작사 토에이 주식회사와 도호 주식회사가 제작한 작품이다.
그레이 프로듀서가 5년 전 일본 영상산업진흥기구(VIPO)에서 국제 공동 제작 관련 프로듀서 워크숍을 기획·운영할 당시만 해도 독립 프로듀서만 참가했는데, 지금은 대형 스튜디오가 많이 참여하고 있다. 이처럼 국제 공동 제작은 거대한 물결이 되어 영화 산업에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국제 공동 제작이 독립·예술 영화 창작자들에게 큰 기회가 될 것이란 점은 분명하지만, 국제 공동 제작에서 거대 자본이 들어올 경우가 만들어 낼 그림자도 존재한다.
중국·베트남·필리핀 등 아시아 주요국 영화제 프로그램 자문으로 활동하고 있는 영화평론가 필립 쉐아는 "친구에게 나는 공동 제작이라는 주제를 정말 싫어한다고 말했는데, 공동 제작이라는 단어가 평등을 내포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파트너십이지만 종종 동등한 파트너십이 아닌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시아 공동 제작자가 소규모 제작자라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그레이 프로듀서는 "이러한 시대의 변화로 인해 독립 프로듀서들이 앞으로 국제 공동 제작에 참여할 여지가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간간이 들린다"고 말했다.
그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는 만큼 "앞으로 독립 프로듀서들이 토에이, 도호 등 대형 스튜디오와 함께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떻게 동등하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국제 공동 제작을 진행해 나갈 수 있을지가 큰 과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국제 공동 제작에 관한 관심과 인식이 높아짐에 따라 더 많은 국가와 공동 제작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독립 프로듀서들이 일본 시장에만 머물지 말고, 국제 공동 제작 시장으로 시야를 넓히며 과감하게 도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포럼 참석자들은 '플랜 75' '르누아르' 등의 사례처럼 국제 공동 제작이 창작자들의 아이디어를 온전히 펼쳐내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면 충분히 기회의 장으로서 역할을 할 것이라 입을 모았다.
조지훈 무주산골영화제 프로그래머는 "국제 공동 제작이 단순히 투자금을 확보하는 것만이 아니라 독립·예술 영화 감독이 원래 하고자 하는 이야기, 자신의 프로젝트를 만들어 세계에 공유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아시아는 너무 다양한 문화와 언어가 있어서 유럽이나 미국처럼 협업하기는 어렵다"며 "그렇기에 영화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원을 어떻게 나누고, 우리가 원하는 영화를 어떻게 하면 더 잘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한다면 공동 제작이 단순히 돈의 언어를 넘어 훨씬 더 중요하게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부산국제영화제 지석영화연구소는 오는 21일까지 '다시, 아시아영화의 길을 묻다'를 화두로 포럼 비프를 개최한다. 올해 포럼 비프는 총 4개 섹션, 9개 세션으로 구성되어 아시아영화 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심층적으로 탐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