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데뷔작 '호주머니 속의 주먹'을 통해서 이것이 내 길이구나, 연출가로서 삶을 살아야겠다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_마르코 벨로키오 감독
국가, 종교, 권력에 맞서 싸워온 이탈리아 출신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이 '현대 영화사의 살아 있는 거장'이라고 불리게 된 시작점에는 바로 그의 첫 장편 '호주머니 속의 주먹'(1965)이 있었다.
21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동서대학교-경남정보대학교 센텀캠퍼스 지하 1층 민석소극장에서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거장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이 참여한 '마스터 클래스: 마르코 벨로키오, 주먹의 영화'가 열렸다. 이날 사회는 정성일 평론가가 맡아 거장의 세계를 깊게 파고들었다.
현존하는 유럽 최고의 거장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은 이번 특별전을 계기 삼아 그의 80여 년 생애 처음으로 아시아 지역 영화제를 방문했다.
벨로키오 감독은 첫 장편 '호주머니 속의 주먹'(1965)이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상영되며 세계 영화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영화는 한 부르주아 청년이 가족에 맞서며 점차 광기로 치닫는 반항의 여정을 그린다. 벨로키오 감독은 "보통 첫 장편은 내 삶의 요약 같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호주머니 속의 주먹'은 하나의 실험 같은 영화입니다. 영화학교에서 연출을 전공한 이후 당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 인생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의 길목에서 중요한 시험이 됐죠. 저한테는 정말 굉장히 중요하고, 영화를 통해 내가 무엇을 할지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데뷔작을 통해서 이것이 내 길이구나, 연출가로서 삶을 살아야겠다는 확신을 갖게 된 거죠."
벨로키오 감독은 20대에 연출한 두 번째 장편이자 정치적·사회적 권력에 대한 투쟁에 관해 풍자한 '중국은 가깝다'(1967)로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으며 주목받는 신예 감독으로 떠올랐다.
'중국은 가깝다'는 마오이스트 청년 그룹이 '중국은 가깝다'라는 슬로건을 걸어둔 채 혁명의 실천 방안을 고민하고, 그러던 중 한 부유한 교수의 저택에 숨어 들어갈 계획을 세우는 내용을 담은 작품이다.
정성일 평론가는 영화에서 마오이즘에 정치적으로 동조하는 그룹을 다루면서도 그들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며, 감독의 영화에서 '정치'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질문했다.
"'중국은 가깝다'는 당시 정치적 슬로건이었어요. 그 시기 이탈리아에서는 마오쩌둥의 이야기나 마오이즘(중화인민공화국 지도자였던 마오쩌둥의 혁명사상으로, 중국의 현실에 맞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변형한 것을 의미)이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마오이즘을 제대로 알아 간다기보다는 중국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생각이 많이 생겨났어요. 어느 시점부터는 거기서 멀어져서 정치적인 것보다는 사적인 부분을 더 찾게 된 거죠.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난 개별적인 관계를 더 중요시합니다. 나와의 관계에 더 중심을 두게 된 거죠."
이후 '슬랩 더 몬스터 온 페이지 원'(1972) '눈, 입'(1982) '굿모닝, 나잇'(2003) 등 현실 정치와 인간 내면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작품들을 통해 자신만의 뚜렷한 영화 세계를 구축해왔다. 특히 '굿모닝, 나잇'에서는 알도 모로 납치 사건을 독창적인 시선으로 재해석하며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았다.
알도 모로는 이탈리아 총리를 5회나 역임한 기독교민주당의 지도자로, 1978년 이탈리아의 극좌파 비밀 테러 조직 붉은 여단(1970년대 초 납치·살인·사보타주 등으로 악명을 떨친 조직)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된 후 살해됐다.
벨로키오는 '굿모닝, 나잇'을 비롯해 '부숴진 꿈' '익스테리어, 나잇'까지 알도 모로를 세 차례나 다뤘다. 이에 관해 그는 "알도 모로 사건은 이탈리아에서 중요한 정치 사건이었다"며 "20년이 흐르면서 정치적인 변화가 있었기에 그 변화를 반영해서 영화를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은 정신분석학자인 마시모 파기올리와 함께 '육체의 악마'(1986) '나비의 꿈'(1994) 등을 만들기도 했다. '나비의 꿈'의 경우 벨로키오 감독이 유일하게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지 않고 온전히 파기올리에게 맡겨 그의 비전에 뿌리를 둔 작품이다.
"마시모와 같이 일한다는 게 처음에는 굉장히 놀라운 스캔들이었어요. 그의 정신분석학 세미나를 들으면서 우울증 등 정신적 어려움의 '완치'에 관해 관심을 두게 됐죠. 인간이기에 바뀔 수 있어요. 혼자가 안 되면 집단적인 치유를 통해서 가능하죠. 이를 영화에 녹인 겁니다."
이날 정성일 평론가는 그의 필모그래피 중 '허공으로의 도약'(1980)에 관해서도 질문을 던졌다. 영화는 억압적인 사회의 순응주의에 맞서는 한 여성의 반란을 그린다. 이 작품의 주연 배우 미셸 피콜리와 아누크 에메는 1980년 칸영화제에서 남녀 주연상을 받았는데, 한 편의 영화로 남녀 배우가 동시에 수상을 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정 평론가는 '허공으로의 도약'을 시작으로 벨로키오 감독의 영화에서 여성에 대한 탐구가 시작한 것으로 보였다고 질문했다.
벨로키오 감독은 "우리가 태어나 삶을 산다는 것은 모든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복하게 살 수도, 삶을 완전하게 채우면서 살아갈 수도 있다"며 "그러나 여성은 아이를 출산하고 어머니가 되면 무의식적으로 조용한 바다처럼 살길 원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정신분석학 세미나를 시작하면서 그동안 소홀했던 남성과 여성의 관계, 여성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마르크스 캔 웨이트'(Marx Can Wait)를 비롯한 다큐멘터리도 종종 만날 수 있다.
끊임없이 시대와 인간에 관한 치열한 탐구를 멈추지 않은 벨로키오 감독은 2011년에는 베니스영화제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았으며, 2021년 칸영화제에서는 명예황금종려상을 받으며 영화계에 끼친 깊은 영향을 다시금 인정받았다.
최근까지도 그는 현대 이탈리아 사회와 역사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담은 시리즈물 '익스테리어, 나잇'(2022)와 장편 '납치'(2023),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2024)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벨로키오 감독은 "나 역시 극영화를 좋아한다. 난 영화에서 최대한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인물 중심으로 만드는 걸 좋아한다. 사실적인 걸 표현하면서 거기에 내 상상을 넣는 것"이라며 "시간적이나 형태적인 면에서 장편 영화가 더 많이 상영될 가능성이 있고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어서 장편 영화를 더 많이 제작하는 편"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마스터 클래스를 찾아 준 관객들을 향해 "영화는 한 시대를 대표하기도 하고, 지금은 사라지거나 변화한 이탈리아의 사회를 반영하기도 한다"며 "'호주머니 속의 주먹'의 경우 60년이 지난 영화라 여기 있는 누구도 그때 태어난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러면서 "이 영화를 누군가 보고 감동하거나 영향을 받으면 내게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