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상 급하게 작품에 들어가게 됐는데, '팬입니다' 하고 자처할 정도로 좋아하던 감독과 배우를 각각 연출자와 상대역으로 만났다. 17.1%(닐슨코리아 유료플랫폼 전국 가구 기준)라는 자체 최고 시청률로 최근 종영한 tvN 토일드라마 '폭군의 셰프'에서 미식가 폭군 이헌 역을 연기한 배우 이채민의 이야기다.
이채민은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라운드 인터뷰를 열어 '폭군의 셰프'와 관련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사랑하는 연지영(임윤아)에게 고백할 때 '매일 아침 비빈 밥을 만들어 주마'라고 한 약속을 지킨 '꽉 닫힌 해피엔딩'이지만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불호' 반응도 일부 나왔던 엔딩에 관한 생각도 들을 수 있었다.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 '회피 엔딩'이라는 반응도 나온 것을 알고 있다는 이채민은 "이 작품에서 이헌을 연기했던 배우로서는 되게 만족스럽다. 너무 눈물 절절한 이별을 했기 때문에"라며 "그렇게 또 되게 멋지게 등장시켜 주시고 비빔밥을 만들어주겠다는 약조를 지키는 엔딩이지 않나. 이헌으로서는 약조도 지키고 재회해서 해피엔딩이다 보니 더할 나위 없었다. 솔직히 저는 되게 만족하면서 찍었다"라고 답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연지영을 다시 만났을 때 초반에 보여준 '덤덤한 태도' 배경을 궁금해하는 반응도 있었다. 이채민은 "이헌이라면 충분히 절절하게 이별하고 사실 현대로 오자마자 만난 게 아니고 어쨌든 저도 뭐 머리 꾸밀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이어 "좀 남자다운 모습도 보여주고, 조금은 아닌 척? 그러다가 지영의 백허그에 저도 받아들이는 모습이 있다"라고 덧붙였다.
이채민은 "지영과 헤어지는 신이 더 절절하면 절절할수록 (엔딩이) 좀 더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저는 오히려 월영루 신을 되게 혼신을 다해서 찍었다"라고 말했다. "이헌과 지영에게 너무 중요하고 이 드라마에서 너무 중요한 신"이었기에 "부담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정말 초집중을 해서 찍었다"라고도 덧붙였다.
시간의 틈이 열렸을 때 '망운록'이 펼쳐지고, 칼에 맞아 눈을 감은 연지영이 책 속으로 들어간 후 '망운록'마저 사라지는 월영루 장면에서 이채민은 수없이 많은 눈물을 쏟으며 울부짖는 연기를 했다. 그는 "워낙 감정 신이다 보니까 감독님, 스태프분들이 제가 감정 잡는 데 있어서 정말 하나의 소리도 없이 다 기다려 주시고 정말 배려를 많이 해 주셨다. 저도 더더욱 감사한 마음에 더 집중할 수 있었고 그 상황에 온전히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라고 돌아봤다.
"고독한 싸움" 같은 시간이 연기에는 더 도움이 됐다. 이채민은 "혼자 허공 보면서도 감정 잡고 울부짖으면서 해야 하니, 조금 더 고독한 싸움이었던 것 같은데 오히려 그렇게 고독한 게 저에게는 그 상황에 더 맞았던 것 같다. 더 외롭고 고독했기 때문에 눈물도 왈칵왈칵 더 잘 났던 것 같다. 최대한 그 상황을 좀 이용해 보려고 많이 노력했다"라고 말했다.
11화에도 이헌의 폭발하는 감정 신이 등장했다. 인주대왕대비(서이숙)의 진찬에서 생모 폐비 연씨(이은재) 죽음의 비밀이 밝혀져 울분과 광기를 토해내는 장면이었다. 이채민은 "정말 더웠던 계절에 특히 그 진연 촬영 땐 마룻바닥에서 절하다가 '앗, 뜨거!' 할 정도로 정말 뜨거웠다.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힘들었던 촬영"이라고 기억했다.
이어 "모두가 최대한 빨리 완벽하게 끝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한 신, 한 컷을 찍을 때마다 정말 집중해서 찍으려고 했고, 최대한 모두를 위해 한 컷 한 컷 진짜 불사르자는 마음으로 했던 것 같다. 저만 힘들었던 게 진짜 아니었다"라고 전했다.
배신감에 복수심을 불태우는 진연 장면은 이채민에게도 "도전 같은 신"이었다. 호흡이 긴 장면을 끌고 가야 하는 임무가 주어져 "되게 부담감도 컸"지만, "눈 맞추고 연기했던 선배님들께서 정말 진심을 다해서 다 같이 느껴주시고 호흡을 맞춰주셨기 때문에 저도 더 집중이 됐다"라고 이채민은 설명했다.
뙤약볕에서 촬영한 게 도움이 된 부분도 있다. 이채민은 "오히려 그렇게 미치광이 같은 캐릭터를 그 순간에 표현해야 할 때 실제로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지친 몸 상태가 지금의 이헌과 더 맞는다는 생각으로 조금 그걸(상황을) 수용했던 것 같다. 그래서 뭔가 더 지치고, 더 발악하고, 더 처절한 이헌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한다"라고 부연했다.
역모를 꾸미고 자행한 세력과 벌이는 살곶이숲 전투도 힘든 촬영 중 하나였다. 촬영을 마치는 데는 "모두의 덕이 컸다"라고 한 이채민은 "그때는 모두가 힘들었기 때문에 전우애를 느꼈다"라며 "모두 지친 상태에서 열심히 한 마음으로, '한번 우리 이겨내 보자, 만들어 보자' 하면서 한뜻으로 다 같이 으쌰으쌰 했던 것 같다"라고 밝혔다.
극 중 이헌과 연지영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서로를 심각하게 싫어했으나, 각각 '반려'가 되길 바라고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겠다고 마음먹을 만큼 깊이 연모하는 사이가 된다. 상대역 임윤아와의 호흡을 묻자, 이채민은 "정말 처음부터 선배님께서 되게 제가 편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많이 노력을 해 주셔가지고 덕분에 좀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 같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사실 그런 것들이 연기하면서 케미(스트리)에서도 보이는 부분이라서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라며 "뭔가 아이디어가 있으면 많이 얘기하면서 소통하려고 저도 노력하고 그걸 다 선배님은 또 받아주시고 같이 고민해 주시고… 그런 부분이 저희 케미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나"라고 바라봤다.
'폭군의 셰프'를 통해 대세로 떠오른 이채민. 작품이 앞으로 어떻게 남을 것 같은지 묻자 "평소에 버럭버럭 화를 낸다거나 어떤 사건 때문에 절절하게 우는 게 많지 않은데, 이 드라마를 하면서 다 표현하고 표출하면서 저도 몰랐던 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 같고, 제 한계를 좀 극복해 본 것 같기도 하고 스펙트럼을 조금 더 넓힐 기회가 됐던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채민은 "또 이렇게까지 예상치 못한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조금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만큼 더 보답할 수 있는 배우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라고 전했다.
특히 장태유 감독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채민은 "같이 작업하면서 저에게 너무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셨다. 정말 제게는 아버지처럼 되게 따뜻하게 많이 챙겨주셨다. 되게 섬세하고 디테일하고 예민하신 분인데, 저의 손짓 몸짓 하나하나 도와주시려고 하고 말투에서 마지막 어미 아이디어도 주셔서 이헌이 탄생했다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대작에 급히 투입되다 보니 장 감독 역시 초반에는 염려도 하고 신경도 더 많이 썼지만, 어느 순간부터 본인을 믿어주었다고 이채민은 설명했다. 이채민은 "'너대로 이제 연기해라, 이제 네가 하면 이헌이다' 하는 식으로 용기 나는 말씀을 많이 해 주셨다"라며 "그때부터는 좀 더 자신감 있게 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장 감독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진짜 평소 팬이라서 이 작품도 저 작품도 너무 재미있게 봤고, 사실 감독님을 이렇게 만나 뵙고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다'라고 고백했다는 이채민. 그는 "정말 진심으로 팬이어가지고 그것(미팅)만으로도 너무 영광이었는데 함께하자고 말씀해 주셨을 때는 솔직히 너무 꿈 같았다"라며 "저에게는 인생에 있어서 몇 없는 행복 중 하나일 것 같다. 어떻게 말하면 '성공한 덕후'다. 정말 그렇다"라고 강조했다.
'성공한 덕후'로서 직접 경험해 본 장 감독은 어땠을까. 이채민은 "저는 더더욱 감독님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드라마의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드라마를 찍으면서 너무 많은 걸 저에게 퍼 주셨기 때문에! 제가 좋아하는 분이 저한테 또 이만큼 사랑을 주시면 저는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고 행복하다. 저는 그 마음(팬심)은 변치 않는다"라고 전했다.
앞으로 함께 연기해 보고 싶은 선배 배우가 있는지 질문이 나오자 이채민은 "아휴!"라며 "아직 저는 그럴 만한 건(위치는) 안 된 것 같다"라며 조심스러워했다. 다만 상대역이었던 임윤아와 다시 작품에서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제가 윤아 선배님한테도 그런 말을 했어요. 선배님이랑 바로 당장은 못 만나 뵙겠지만 언젠가는 다시 한번 어떤 관계로든, 어떤 역할로든 만나 뵙고 같이 촬영을 해 봤으면 좋겠다고 제가 직접적으로 선배님한테 그런 말씀을 얼마 전에도 드렸었거든요. 그만큼 저는 너무 좋았어요. 저는 너무 선배님께 배운 것도 많고 감사한 점도 많아서 다시 한번 또 만나 뵐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현대로 타임슬립한 이헌의 모습으로 마무리된 것을 두고 '시즌 2'를 기대하는 시청자들도 있다. 이채민은 "그러니까 또 그런 얘기도 많더라. 근데 저도 아직 '시즌 2' 얘기는 들은 게 없어서 조심스럽다. 혹시나 기회가 마련되고 모두가 함께 작품에 참여할 수 있다면 저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라고 답했다.
'폭군의 셰프' 이후 대본이 많이 들어와 '미어터지지 않느냐'라는 질문에 "아, 그렇습니까?"라고 웃은 이채민은 "저도 한 작품 한 작품 읽어보면서 신중하게 선택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