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주의
"어쩔수가없다, 어쩔수가없다, 어쩔수가없다…."
특수제지 분야의 전문가로서 사랑하는 아내와 두 자녀, 두 마리의 반려견과 함께 부족함 없이 살아가고 있던 평범한 가장 만수는 25년간 헌신한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해고된다. 회사는 어쩔 수가 없다는 말로 만수를 헌신짝처럼 해고했지만, 만수에게는 목숨줄이 날아간 일이다.
아내에게 반드시 재취업에 성공하겠다고 자신 있게 공언했지만, 녹록지가 않다.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지는 상황에 '실직은 내 잘못이 아니다' '나는 반드시 재취업에 성공한다'고 거듭 자신을 다독여보지만, 현실은 만수를 다독여주지 않는다. 어렵게 장만한 집까지 내놓아야 할 처지에 몰리며 벼랑 끝에 선 만수는 결국 "어쩔수가없다"고 되뇌며 자신만의 전쟁을 준비한다.
해고된 만수는 모두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한 인물이지만, 만수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재취업을 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그는 결코 공감할 수 없다.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변명하지만, 과연 내가 살기 위해 타인을 죽이는 게 용납될 수 있을까. 현실과 도덕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는 만수를 보는 관객들 역시 공감과 비난 사이를 오가게 된다.
배우 이병헌은 만수라는 블랙 코미디 그 자체인 인물을 어두움과 웃음, 공감과 비난 사이를 오가며 138분을 가득 채운다. 그는 스스로도 궁금했다. "재밌어서 관객들에게 빨리 보여주고 싶은 마음 반, 도대체 이게 어떻게 나올지 마음 반"으로 작품에 임해 지금까지 왔다.
이병헌은 "박찬욱 감독님 영화는 후반에서 정말 많은 것들이 창작되기 때문에 어떤 모양새로 나올까가 궁금했다"며 "내가 보고 싶은 마음도 되게 컸다"고 했다. 과연 반반의 마음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평범한 가장 만수의 어쩔 수가 없는 살인 재취업기
▷ 평범한 인물이 갑작스러운 해고라는 위기를 돌파해 가는 상황은 정말 '웃프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만수는 절박함과 어설픔을 오가며 자신만의 전쟁을 치르는 인물이다. 처음 만수라는 캐릭터를 봤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궁금하다.
이병헌> 되게 평범한 가장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평범한 사람으로서 내리지 못할 결정을 내리고 실행에 옮기는데 우왕좌왕 안 하면 오히려 이상할 수 있다. 처음엔 아라(염혜란)의 손에 의해 첫 제거 대상인 범모(이성민)가 제거되긴 하지만, 처음에는 그런 무시무시한 행동을 하면서 흔들림도, 두려움도 많았을 거다. 그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렇지만 두 번째에서 몸싸움 중 잘못 나간 총알로 시조(차승원)가 죽었다고 해도, 점점 죄책감이 좀 옅어지는 것 같은, 도덕적인 감각이 없어지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그에 비해 세 번째는 굉장히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완전 범죄로 만드는 능숙함까지 보인다. 영화 전체를 놓고 평범한 사람이 무시무시한 상상을 하고, 그 상상이 결정으로 이어지고, 결정을 죽을 것 같지만 하나하나 꾸역꾸역 실행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변화를 생각하며 연기했다.
▷ 극 중 만수는 가족들에게 "우리들의 전쟁"이라는 말을 한다. 만수는 정말 경쟁자를 죽이는 것이 '우리'의 전쟁이라고 생각한 건가?
이병헌> 아들 시원(김우승)에게 전쟁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진짜 우리 가족의 전쟁이라고 생각하고 한 대사다. 만수는 여전히 옛날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다. 사양산업인 제지업계 노동자였고, 여전히 가부장적 느낌이 남아 있다.
아내와 아이들을 아끼지만, 먹고살 만해지면 마초적인 기질도 살짝 나오는 남자다. 내가 꿈꿔온 내 집을 다시 찾았는데, 가족이 여기서 살아줬으면 하는 자기만의 욕심일 수 있다. 그러나 만수는 혼자 일을 저지르고 있지만, 사실 다 우리 가족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아마 관객들이 많이 웃고, 대중적인 시퀀스 중 하나가 조용필의 '고추잠자리'가 흘러나오는 중 펼쳐지는 액션, 이른바 '고추잠자리' 시퀀스 아닐까 싶다. 그 장면과 관련한 비하인드가 궁금하다.
이병헌> 하나도 쉬운 게 없었다.(웃음) 이성민, 염혜란 배우와 뒤엉켜 싸우는 신은 합이 따로 없다 보니 리허설만 하루를 따로 했을 정도다. 대본에도 '다시 상황이 역전된다. 끌려 가면 안돼서 가까스로 일어난다' 이렇게만 있었다. 사실 배우가 촬영을 앞두고 몇 개월 동안 마음의 부담 덩어리로 있는 시퀀스가 있는데, 그게 바로 '고추잠자리' 시퀀스였다.
그 시퀀스가 약간 연극적인 느낌도 있어서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지도 고민됐다. 육체적으로도 힘들었다. 특히 염혜란 배우는 발가락이 골절돼서 감독님이 걱정하셨다. 그런데 괜찮겠냐고 물어봐도 자기는 괜찮다면서 진짜 힘들어하는 기색 없이 며칠 동안 찍었다. 대단한 체력과 참을성의 소유자다. 염혜란 배우가 제일 힘들었을 거다.
'박찬욱' 그 자체인 '어쩔수가없다'
▷ 시조를 죽인 후 분재처럼 묶어서 처리하는 장면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그 자체였다.
이병헌> 그게 만수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어쩌지 못해서 주저하는 모습이 그 사람 성격이기도 한데, 또 특기를 살려서 분재처럼 예쁘게 시조를 처리한다.(웃음) 박찬욱 감독님의 개성이 듬뿍 들어간 신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꽉 차 있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가도 어떤 신은 잔인하고 기괴하기도 한데 또 이상하게 되게 아름다웠다는 이미지가 진하게 남는 게 감독님 영화의 특징이다. 지금까지 못 볼 걸 본 거 같은 느낌인데 왜 아름다운 잔상이 남지?(웃음)
▷ 박찬욱 감독 영화에는 '박찬욱'스러운 유머가 등장한다. '어쩔수가없다'로 재회한 박찬욱 감독과 작업하면서 새삼스럽게 그의 유머는 어땠나?
이병헌> 우리는 서로 자기의 유머가 더 고급스럽다고 이야기한다.(웃음) 서로의 유머 코드는 살짝 다른데, 결과적으로 영화를 보면 재밌다. 공통분모를 잘 뽑아서 편집한 거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게 있다. 서로 안 세월이 오래되다 보면 상대방의 유머에 넘어가지 않으려 애쓰는 그런 사이가 됐다.(웃음) '공동경비구역 JSA' 때부터 감독님과의 작업이 즐거운 건, 서로 유머의 결은 다르지만 쿵짝이 잘 맞아서다.
이병헌에게 만수의 '엔딩'이란
▷ 영화의 결말을 두고 어쨌든 해피엔딩이라는 사람과 비극이라는 사람으로 나뉜다. 만수를 연기한 사람으로서 결말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병헌> 난 처참한 비극, 아주 갈기갈기 찢어진 비극이라 생각한다. 새로운 직장에 처음 출근할 때 가족들과 헤어지는 모습은 시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다. 아마 영혼이 없을 정도의 마음 상태라 생각한다. 어쩌면 미리는 엔딩 신 이후 아이들과 떠났을지 모른다. 원래는 떠나는 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걸 열린 결말처럼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셨는지 지금의 엔딩이 됐다.
만수 역시 그 자리에서 다 이뤘다고 했지만, 결국 다 잃은 거다. 공장에서도 이거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이상하게 뭔가 기분이 안 나서 혼자 파이팅한 거다. 그리고 거기서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가는데, 만수의 얼굴은 세상 기운 없고 우울한 표정이다. AI로 인해 자동화된 공장 안에서도 만수는 여전히 길을 헤매는 것 같은 모습이다.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처럼 만수도 꺼져버리라는 느낌으로 불이 하나씩 텅텅 꺼진다. 정말 비극이라 생각한다.
▷ 영화에서도 AI가 등장하지만, 현실에서도 AI 배우가 등장하면서 배우들의 고민이 클 것 같다.
이병헌> 구체적으로 어떻게 위협할지 모르겠지만, 위협이라는 건 명확하다. 동료 배우가 나오는 짤막한 영상이 있길래, 실제로 만났을 때 영상을 보여줬더니 자기가 찍은 게 아니라는 거다. 너무 똑같아서 놀라고 소름 끼친 적이 있다. 가만히 생각하면 내 것도 있더라. 그런 걸 보면 AI의 위협이 근미래가 아니라 지금의 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술에 대처할 방법을 찾을 시간과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의 차이가 크다. 그래서 더 위협적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