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김연경 왜 안 나오나 ①] 중고배구 현장의 절규 "기본기 부족? 운동할 시간조차 부족해요"

'제36회 CBS배 전국중고배구대회' 개막일인 8월 29일 경북 영천 최무선관에서 18세 이하 여자부 전주근영여고와 제천여고의 경기가 열리고 있다. 영천(경북)=황진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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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중고배구 현장의 절규 "기본기 부족? 운동할 시간조차 부족해요"
(계속)

'김연경의 시대'가 저물면서 배구계는 위기에 직면했다. 당장 다가올 2025-2026시즌 흥행 실패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장기적으로는 '제2의 김연경' 등 스타 발굴이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한국 여자 배구는 지난 10여 년간 '배구 여제' 김연경을 중심으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김연경은 국가대표 에이스로 2021년 도쿄올림픽 4강 신화를 이끌고, V리그 무대에서도 흥행을 견인했다.

그러나 김연경이 코트를 떠나면서 간판 스타의 부재는 곧 리그 전체의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맴돌고 있다. 한 배구계 관계자는 "김연경 은퇴 후 찾아올 위기는 모두 알고 있었던 사실"이라면서 "김연경 같은 선수가 더 나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국제 대회에서는 이미 김연경의 공백이 여실히 드러났다. 현역 은퇴보다 약 4년 먼저인 도쿄올림픽 이후 김수지(흥국생명), 양효진(현대건설) 등 이른바 황금 세대들과 함께 태극 마크를 반납했고, 이들이 떠난 여자 배구 대표팀은 급격한 내리막을 걸었다. 결국 올해 국제배구연맹(FIVB)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 잔류 실패라는 처참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남자 배구도 마찬가지다. 2018년 이후 7년째 VNL 무대를 밟지 못하고 있고, 2025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3전 전패로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최근 아시아 무대에서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메시아와도 같은 '제2의 김연경'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한국 배구의 미래를 육성하는 중고 배구 현장에서는 "말처럼 쉽지 않다"며 구조적으로 열악한 현실을 지적했다.

'제36회 CBS배 전국중고배구대회' 폐막일인 5일 경북 영천 영천체육관에서 18세 이하 남자부 결승전 수성고와 제천산업고의 경기가 열리고 있다. 역대 최다인 75개 팀이 출전한 이번 '제36회 CBS배 전국중고배구대회' 는 영천체육관, 영천생활체육관, 최무선관, 영청 금호체육관 등에서 8일간의 열전 끝에 막을 내렸다. 류영주 기자

김연경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기본기'다. 3년 전 CBS배 전국중고배구대회를 찾은 김연경은 "학교 다닐 때 훈련을 정말 많이 했다"면서 "학생 때는 많은 훈련을 해야 성장할 수 있다"고 짚었다. 이어 "루틴이라고 할 것도 없이 감독, 코치님들이 지도하는 것들을 열심히 하려고 했다"고 돌아봤다.

그러나 '공부하는 학생 선수'를 만들겠다는 정부 정책이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이다. 학생 선수들의 학습권을 보장하겠다는 취지로 만든 제도들이 오히려 운동권을 침해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2017년부터 시행된 '최저학력제'는 학생 선수가 일정 수준의 학력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경우, 교육부령으로 정하는 경기 대회 참가를 학교장이 허용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고등학생 선수에 한해 완화됐는데, 최저 학력에 도달하지 못한 고등학생 선수는 기초 학력 보장 프로그램을 이수하면 경기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

그러나 학생들과 학부모, 지도자들은 여전히 폐지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지난달 대한체육회가 조사한 최저 학력제 인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초등학생의 61.5%, 중학생의 81.7%, 고등학생의 84.5%, 학부모의 76.1%, 지도자의 81.3%가 '현행 최저 학력제의 폐지 또는 개선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이들이 폐지를 주장하는 사유로는 ▲학생 선수에게 과도한 규제 ▲학생 선수의 진로 및 훈련 방해 ▲모든 학교의 수준 차이를 고려하지 않음 등이 있다. 대회 및 훈련에 따른 결석 허용 일수에 대해서도 현재 초등학생 20일, 중학생 35일, 고등학생 50일에서 초등학생 40일, 중학생 60일, 고등학생 80일로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8월 29일 경북 영천 영천체육관에서 열린 '제36회 CBS배 전국중고배구대회' 18세 이하 남자부 수성고와 인하사대부고의 경기에서 수성고 후인정 감독이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다. 영천(경북)=황진환 기자

지난달 5일 막을 내린 제36회 CBS배 전국중고배구대회 현장에서 CBS노컷뉴스와 만난 지도자들은 이같은 제도적 한계 탓에 훈련 시간이 부족하다고 토로했다. 정규 수업을 다 마쳐야 훈련할 수 있고, 늦은 시간까지 훈련할 수 없게 통제해 기본기를 쌓을 시간이 없다는 주장이다.

김재남 일신여상 감독은 "10년 전만 해도 새벽, 야간 운동까지 했다"면서 "요즘은 수업을 다 마치면 4시 반 정도인데, 잠깐 운동해서 프로에 가면 언니들한테 대적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기본기를 따라갈 수가 없다. 옛날과 운동량도 차이가 크다. 그래서 신인 선수들이 프로에 가면 오래 버티지 못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김 감독은 "학생 선수들에게 성적이 안 된다고 대회에 못 나가게 한다면, 일반 학생들도 성적이 안 되면 졸업을 안 시켜야 한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어 "운동하는 아이들은 다르게 가르쳐야 한다"면서 "운동 선수에게만 너무 가혹하지 않나. 현장을 모르는 사람들이 만든 정책이라고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한국 배구 전설로 꼽히는 후인정 수성고 감독도 "옛날보다 훈련량이 확실히 줄었다. 훈련 시간도 부족하다"면서 "고등학교는 성적을 내야 하는데 단시간 내 많은 걸 하려다 보니까 기본기 훈련할 시간이 없다"고 고충을 드러냈다. 2021년부터 2024년까지 남자 프로배구 KB손해보험 사령탑을 역임했던 후 감독은 프로 선수들을 이끌다가 고등학생 선수를 지도하려니 제약이 많다.

프로 무대에서도 느꼈던 문제다. 신인 선수가 합류하면 기본기부터 다시 가르쳐야 했다. 후 감독은 "우리가 뽑아서 프로까지 올라온 선수인데, 2단 토스나 언더 토스가 안 되는 선수가 너무 많다"면서 "기본기부터 탄탄하게 밟아 와야 했는데 일단 성적을 내야 하니까 공격 위주로 훈련해서 기본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연경 역시 "학생 때는 공격이나 화려한 것을 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그런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수비, 토스 등 기본적인 것에 중점을 뒀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다만 성적에 따라 진학 여부가 결정되는 엘리트 체육의 현실이 발목을 잡는다.

2022년 9월 15일 충북 단양국민센터에서 열린 '제33회 CBS배 전국남녀중고배구대회' 개막식에서 흥국생명 김연경 선수가 팬들에게 사인볼을 전달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류영주 기자

인구 절벽 현상에 따른 학생 선수 감소도 심각한 문제다. 아이 하나만 낳고 키우기도 벅찬 시대에 자녀를 열악한 엘리트 체육 현장에 몰아넣어 운동 선수로 키우고 싶지 않은 게 부모 마음인 현실이다.

한 고등학교 지도자는 "요즘 한 집에서 ​한두 명 있는 소중한 아이들에게 운동시킨다는 건 부모로서 쉽지 않은 선택일 것 같다"고 짚었다. 이어 "자녀가 온실 속 화초에서 자라길 바라실 텐데 험악한 운동 현장에 넣는다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연경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 김연경은 "팀 숫자가 너무 적다. 선수들이 많아야 그 안에서 발굴할 텐데 선수가 적어 매우 안타깝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어 "유소년 쪽에서 지탱이 잘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상급 학교로 올라오면서 무너지고 있다"고 짚었다.

이 모든 문제가 맞물리면서 한국 배구는 단순히 스타 선수의 부재를 넘어, 리그와 국가대표팀의 근간을 흔드는 구조적 위기에 직면했다. 이에 김연경은 "'제2의 김연경' 1명만을 기다리는 것은 요행이고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선수 1명을 발굴하기보다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결국 한국 배구의 위기는 단순히 한 세대의 부침으로 설명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다. 엘리트 체육 제도의 경직성, 학습권 중심 정책의 부작용, 인구 감소에 따른 저변 축소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전문가들은 지금이야말로 선수 육성 시스템 전반을 다시 설계해야 할 시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단기 성적보다 장기적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학교·클럽·프로팀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선수 발굴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스포츠 최고 스타 반열에 오른 김연경의 전성기가 한국 배구의 황금기로 보였던 착시 현상. 김연경이 강조했듯, '제2의 김연경'을 기다리기보다 '김연경이 나올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한국 배구가 다시 도약할 유일한 길이라고 배구계는 입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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