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집권 후 첫 아시아 순방 외교에 나서면서 형식 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광폭 외교'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순방 중에 한·중·일 3국 정상과 잇따라 정상회담을 여는데다, 갈수록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동남아시아에서도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정상들과 만나 의미 있는 결속을 다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동선이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순방의 경로를 따라가 보면 '제1도련선(First Island Chain, 일본 규슈~오키나와~대만~필리핀을 잇는 선)'과 일치한다.
미국은 냉전 이후 '제1도련선'을 중국·러시아 해군의 태평양 진출을 견제하는 방위선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반해, 중국은 이를 자국의 해양활동을 제약하는 장벽으로 간주하고 이를 넘어서는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이번 순방 경로는 트럼프 대통령이 '제1도련선'을 지키겠다는 무언의 '안보 행보'로 읽힐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4일 오후 11시(미 동부 표준시간) 워싱턴DC에서 아세안 정상회의가 열리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로 출발한다. 이는 2017년 이후 처음으로 아세안 정상회의에 복귀하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첫 임기 때인 2017년에 아세안 정상회의의 일부만 참석했고, 그 이후에는 줄곧 불참했다.
아세안은 현재 트럼프발(發) 관세 정책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곳이기도 해, 무역 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뤄지는 등 행사의 긴장도가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아세안 참석은 중국의 앞마당인 말레이시아에서 대놓고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의중이 담겼다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최근 중국 해안경비대는 남중국해에서 강력한 물대포를 발사하고 이들 지역 국가의 정부 선박을 들이받는 등 크고 작은 마찰을 일으키고 있는데, 이번 회의에서 미국이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역 안보' 이슈 등이 주요 안건으로 제시될 것으로 보인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27일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28일 오전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신임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다.
일본과의 무역합의가 타결된 만큼 외교가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에는 일본의 방위비 증액을 요구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일본이 미국에 투자하기로 한 5천500억 달러의 첫 프로젝트가 발표될지에도 이목이 쏠린다.
미국은 동아시아의 안보 부담을 동맹국들이 적극적으로 분담해야한다고 강조하면서 일본에 대해서는 방위비를 국내총생산(GDP)의 3.5%로 증액하도록 압박하고 있는 상태다.
다카이치 총리가 전임 총리가 체결한 미·일 무역합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만큼 이 부분에서 자칫 불협화음이 불거질 수도 있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29일에는 경주APEC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는다.
지난 8월 말에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29일 이재명 대통령과 2번째 정상회담을 하고 APEC 최고경영자 오찬에서 기조연설을 한 후 저녁에는 정상들과의 실무 만찬에도 참석한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들이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양국간 관세·무역 협상이 핵심적으로 다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최대 쟁점인 3천500억 달러 대미 투자를 두고 미국은 전액 선불 투자에서 한발 물러난 상태지만 현금 투자 비중과 분할 납부 기한 등에서 양국은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이번 정상회담에서 극적 타결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다만 양국 협상의 세부 사안은 APEC 이후로 넘기더라도 한미가 큰 틀에서 합의한 통상·무역 관련 내용이 발표될 가능성이 있다.
방한 이틀째인 30일 오전 트럼프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양자회담을 가진 뒤 워싱턴DC로 복귀한다.
트럼프 재집권 이후 미중 정상간 첫 대면 회담이 한국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줄곧 시진핑 주석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공언해왔지만 현재 양국 간 걸림돌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미중 정상회담에서는 최근 문제가 된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는 물론 미국의 반도체·소프트웨어 수출통제와 관세 등을 포함한 양국 무역 협상 내용이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여기다 중국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 문제, 미국산 대두 수입 중단, 대만 관련 사안 등도 논의될 수 있다.
특히 '관세 전쟁'으로까지 치달았던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은 한국은 물론 세계 각국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두 정상이 경주에서 어떤 해법을 도출할 지에 큰 관심이 모아진다.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미중 양국은 관세, 펜타닐, 우크라이나 전쟁, 희토류 등의 각종 현안에서 엇박자를 내왔다.
이런 상황속에서도 양국은 4차례의 고위급 회담을 이어가며 '관세 유예' 기간을 연장하는 등 접점을 찾기위한 노력을 계속해왔다.
양국의 상호 '관세 유예' 시한이 다음달 10일로 끝나는 만큼, 이번 회담에서 가시적인 결과물이 도출될 수 있다는 기대감도 나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 기간 중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장과의 '깜짝 회동'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트럼프 행정부 고위당국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 관련 사전 전화브리핑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미래에 김정은을 만나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했지만, 이번 순방 일정에는 없다"면서도 "물론 변동이 생길 수는 있다"고 여지를 남겼다.
우리 정부도 "가능성은 늘 열어놓고 있고, 동향을 파악하고 있다"는 입장이다.